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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원리주의의 실체

기쁨조미료25 2007. 11. 23. 10:19
이슬람 원리주의의 실체

전호진 (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오늘날 전 세계는 테러, 납치, 살상 등 온갖 폭력을 동원하는 이슬람 원리주의라는 무서운 집단으로 인하여 공포에 떨고 있다. 9.11테러는 세계를 새로운 전쟁터로 몰아넣었다. 일본학자들은 이 전쟁을 보이지 않는 전쟁, 종교전쟁으로 일컬었다. 이슬람 원리주의 집단들은 세계 곳곳에서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지난 7월 아프가니스탄 봉사단원들을 납치한 탈레반은 가장 악한 이슬람 원리주의 집단 중의 하나이다. 빈 라덴의 알카에다도 앞으로 어디서 또 무서운 테러를 할지 모른다. 지금 파키스탄과 이라크에서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한 테러가 계속 되고 있다.

 

이슬람은 2020년까지 한국을 이슬람화하겠다고 공격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며,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전 세계를 이슬람화하기 위하여 엄청난 돈을 쓰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언론은 이슬람의 적극적 선교활동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왜 기독교가 타종교 사람들에게 선교하느냐고 비난한다. 미국이나 서방 세계는 이슬람 원리주의 집단의 무서운 테러 공포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 영향인지 미국에서 9.11테러 이후 종말론에 관한 책이 날개 돋친 듯 매진되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테러 공포증에 걸려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만약 선교사들이 또 테러나 납치를 당하면 한국 기독교는 수습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비난과 조롱을 당할 것으로 본다. 이미 정부나 여론은 선교운동에 압박을 가하고 있는데, 또 다시 이번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사태가 일어나면 기독교 선교와 전도를 중단하는 법을 제정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야 할 이슬람 원리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1. 원리주의의 기원

원리주의란 본래 기독교 용어로서, 근본주의(fundamentalism)라고도 한다. 필자는 일본식으로 원리주의로 표현한다. 이 용어는 20세기 초기 미국 기독교의 신학 논쟁에서 시작되었지만 이 후 아시아의 비기독교 종교의 원리주의 운동에도 적용되었다. 20세기 초반 미국 교회와 신학계에는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하여 성경의 기본적 교리를 부정하게 된다. 이 신학운동은 미국은 물론 모든 서구 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이적, 육체의 부활과 승천을 모두 부정할 뿐만 아니라 특히, 성경이 영감으로 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정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근본을 심각하게 흔드는 것이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여기에 대항하여 성경적 기독교를 옹호하고 보호하려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데, 이것이 바로 초기 기독교 원리주의이다.

 

후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다른 종교들이 부흥하게 되면서 기독교식의 원리주의 운동이 일어나는데, 이들 운동도 그대로 원리주의라고 불리게 된다. 예를 들면, 힌두교, 불교, 이슬람 및 시크교에서도 원리주의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종교 원리주의는 기독교 원리주의와 좀 다른 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원리주의는 기독교 내부의 신학적 소위 좌경화에 대한 반동 운동이었던 반면, 다른 종교의 원리주의 운동은 주로 서구화 혹은 근대화에 대한 반동운동이 핵심을 이루게 된다. 신학적 자유주의나 좌경화 보다는 그들 사회가 서구 문명으로 오염된다는 위기의식이 비서구권 종교들의 원리주의 운동에 더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현대에 와서 원리주의라는 용어는 불행하게도 편협한 사고(narrow-mindedness), 몽매주의, 반 근대주의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기독교 원리주의’라는 용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편협하고 반근대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를 비판한다. 그러나 비판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원리주의’에도 사회 변혁(social transformation)에 관심을 가지는 개혁신학에서부터 사회적 관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몽매주의(obscurantist, 계몽주의의 반대)와 편협주의(narrow-minded)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아시아에서 사용되는 기독교 원리주의’는 엄밀히 말해, 많은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의 기본 가르침들을 철저하게 믿기 때문에 기독교 원리주의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슬람 원리주의’는 폭력과 테러로 인하여 전 세계에 나쁜 이미지를 주고 있다. 마스크를 하고 총을 흔들어대는 투사로서의 이미지, 아프가니스탄 산악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미국 등 연합군과 전투하는 알 카에다 등등, 그래서 서구에서 ‘이슬람 원리주의’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연상시킨다. 이슬람 원리주의로 인해 서구와 이슬람은 불행하게도 대립관계로 정립되고 말았다. ‘이슬람 원리주의’하면 코란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코란의 가르침을 억지로 강요하는, 광적이며 편협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들 무슬림들은 경전(sacred text)을 읽는 방식에서도 편협하지만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현대화에 뒤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backward)"로 멸시받으며, 책에서나 대중 매체들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로 통용되고 만다. 물론 이것은 서구가 보는 이슬람 원리주의의 이미지이다. 비서구 세계에서는 이들을 동정적 눈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좋은 면을 보자면, 사실 ‘이슬람 원리주의’의 본 의미는 코란에 기초한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는 현대 이슬람 정치 운동들과 사상들을 가리킨다. 다음 장에서는 이슬람 원리주의의 등장과 사상에서부터 현대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활동까지 알아보도록 한다.

 

2. 이슬람 원리주의(Islamic Fundamentalism)

이슬람 원리주의의 등장 원인과 사상을 분석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슬람 원리주의 등장 원인은 복합적이다. 이슬람 원리주의는, 19세기 초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작된 와하비 원리주의와 20세기에 발전되기 시작한 현대 원리주의로 분리해야 된다. 대부분 학자들은 현대 이슬람 원리주의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양자의 핵심 사상은 동일하다. 특히 과격 테러리스트들의 테러는 와하비 원리주의를 그대로 실행에 옮기고 있다.

 

(1) 이슬람 원리주의란?

이슬람 원리주의 역시 기독교 원리주의와 마찬가지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코란으로 돌아가서 이슬람의 근본적 원리를 찾자는 것이다. 기독교 원리주의가 어디까지나 신학적이며 신앙적이어서 신학적 신앙적 근본 교리를 보존하고 실천하자는 것인 반면, 이슬람 원리주의는 소위 “이슬람 해결책“을 강조하면서 사회 모든 분야, 즉 정치 경제, 사회 모든 영역에 이슬람 원리를 적용하고 실천하는 이슬람 정치를 강조한다. 따라서 이슬람 원리주의는 이슬람을 정치, 경제, 사회의 해결자로 자임하는 점에서 철저하게 정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이슬람의 이데올로기화라고 볼 수 있다. 노골적으로 무슬림은 이슬람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자부하면서 스스로 이슬람을 ‘거룩한 이데올로기(holy ideology)’로 말한다.

 

이슬람은 과거 코란에 의한 황금시대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원리주의도 과거 황금시대가 있었는데, 이 황금시대를 실현하는 것을 중시한다. 여기서 샤리아(이슬람 법)에 의한 통치가 강조된다. 이것을 위하여 알라세계에 복종하지 않는 세계는 칼로서라도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상은 이란 정치학자 Hossein Motabaher에 의하면 이슬람의 교리라기보다는 이 세계를 선과 악의 투쟁으로 보는 페르시아적 이원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 같은 이슬람 원리주의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작된 와하비 원리주의와 후기 원리주의로 구분해야 하는데, 먼저 이슬람 원리주의에서도 그 핵심에 속하는 와하비 원리주의에 대해서 알아보자.

 

(2) 와하비 원리주의

오사마 빈 라덴이나 탈레반 같은 급진적 이슬람 운동의 뿌리는 바로 ‘와하비 운동’이다. 와하비 운동의 주장이나 사상을 알면 이슬람 원리주의를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와하비 운동의 창시자인 와하브(Muhammad Abd al-Wahhab: 1703-1787)는 엄격한 이슬람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와하브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수니학파의 엄격한 종파 신앙을 가르쳤다. 와하브는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여러 형태의 이슬람 신학과 신화를 공부한 자로서, 그는 수피(Sufi) 이슬람을 공격하고 아라비아로 돌아와서 자신이 해석한 이슬람 교리들을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과거 이슬람 학자들이 쓴 이슬람 책은 문제가 많다고 정죄하였다. 그는 이전의 이슬람 학자들(물라)이 쓴 책에서 비 이슬람에게 관용을 가르치는 부분은 다 삭제시킬 정도로 이슬람을 전투적 종교로 개조하고 만다. 그리고 마호메트가 가르친 본래의 이슬람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 코란과 순나(순나는 마호메트가 가르친 습관과 종교적 실천)로 복귀하여 이슬람에 첨가된 미신적 신앙이나 거짓된 실천과 관습은 다 제거하자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고향에서 내 쫓겼는데, 심지어 그의 형마저 동생을 극단주의라고 배격하였다. 과격한 사상으로 2년간의 은둔 생활 후에 많은 책을 저술하지만 술래이만이라는 그의 형마저 동생의 오만과 광신적 신앙을 도리어 증오한다. 형은 [와하브파를 반대하는 신의 분노]라는 저서에서 동생의 성직자 자격을 노골적으로 비난하였다.

 

이러한 그의 이론에 감동한 첫 개종자는 무하마드 이븐 사우드(Muhammad ibn Sa'ud)였다. 사우드는 아라비아의 한 토후로서, 와하브는 사우드에게 그의 교리와 무기 사용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사우드 토후가 와하브와 손을 잡게 된 근본적 이유는 와하브의 지하드 이론이 당시 분열되었던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는 수단으로 삼는데 대단히 유익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양자의 결탁을 정치학자들은 종교와 정치의 불순한 동맹(unholy alliance)으로 말한다.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안토니 바스부는 이것을 “경전과 칼의 동맹” 혹은 군대와 교회의 동맹으로 정의한다(アントワヌ∙バスブス、山本知子 驛 『サウジアラビア:中東の鍵を握る王國』(集英社、2004)51-52).

 

와하비의 원리주의 사상을 요약하자면, 첫째, 와하비주의는 반 과학적이다. 미국이 달에 로켓트를 쏘았을 때 이것을 보도하지 않은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거부하고 계속 평평하다는 것을 주장한 자는 이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던 장로 빈 바스였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신은 과학을 버린다고 가르친다. 압둘라아지즈 왕조차 자동차, 라디오 등 근대과학 문명을 도입하기 위하여 물라와 부족들을 설득하는데 일 년이 걸렸다고 술회하였다. 전화기도 왕궁에 도입하는데 먼저 코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조건으로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와하비주의는 철학, 예술을 증오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미술전은 불가능하거니와 철학도 신중해야 한다. 이슬람 초기에 벌써 코란 해석의 지식을 활용하는 것을 이단시 한 전통과 역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 전통에 따라 코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원리주의의 특징이다. 이 전통대로라면 하루 5번 기도하지 않는 자는 배신자 취급을 당하게 되어있다. 셋째, 와하비주의는 노골적으로 기독교와 유대교를 미워하는 것을 가르친다. 현대 와하비주의의 해석자인 빈 바스는 코란과 순나에서 모든 무슬림들은 기독교 신자와 유대교도들에 대하여 적대심을 표명하는 것이 모든 무슬림들의 의무라고 강조한다. 와하비주의는 기독교를 잘못된 무신앙으로 간주할 정도이다. 그래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절대로 기독교 교회당을 허락하지 않는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이 교황을 만나는 자리에서, 교황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에게 사우디아라비아의 있는 1만 명의 크리스천들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넷째, 와하비주의는 여성을 비하한다. 이슬람 종교는 무엇보다도 여성 비하의 종교라는 인상을 피할 수 없다. 최근 아라비아의 한 공주가 가명으로 여성해방을 호소하는 책을 서방에서 출판하였다. 내용에 의하면, 여자들은 교통사고가 나도 남자의 절반만 보상 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는 재판 시 증인의 신분조차도 안 된다고 한다. 아울러 탈레반의 여성 확대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3) 현대 이슬람 원리주의

현대 이슬람 원리주의는 점진적으로 발전하였다. 초기(20세기 초) 이슬람 원리주의는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서구와의 투쟁 혹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 원리주의 사상이 민족주의에 기여한 셈이다. 그러나 독립 후,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민족주의에서 신정국가 건설을 더 중시하여 자기 나라가 철저한 이슬람 국가가 되지 않는 데 불만을 표출하고 민족 국가에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이집트의 낫셀 암살은 이러한 사건의 대표적 케이스이다. 인도네시아 아체 지역에서 일어난 강력한 반정부 투쟁도 역시 유사한 케이스이다.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구소련과의 전쟁은 현대 이슬람 운동을 국제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무신론과 이슬람의 대결로 구도화 되면서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아프가니스탄으로 집결시켰다.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무대를 옮긴 것은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의 국제화를 부추기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된다. 여기서 그는 이슬람 움마(세계적 공동체)의 실현을 위하여 “이슬람 세계 혁명” 혹은 “이슬람에 의한 세계정복”을 꿈꾼다.

 

이와 같은 현대 이슬람 원리주의는 사실상 와하비 원리주의와 다르지 않다. 와하비 원리주의와의 차이점이라면, 현대 이슬람 원리주의는 서구와 미국을 주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와하비가 기독교와 유대인들을 미워하라고 했던 것의 오늘날의 상황화라고 보면 될 것이다. 현대 이슬람 원리주의는 반서구, 반자본주의, 반민주주의이다. 테러를 정당화하고 자신들이 죽는 것을 성전으로 생각한다. 코란은 지하드를 수행하다고 죽는 자는 천국에서 72명의 미인들과 술과 고기로 대접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철저히 샤리아를 실천할 것을 주장한다. 이 법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간음한 자는 공개 처형을 당하게 되는 것인데, 주로 여자들이 돌로 처형을 당한다. 탈레반 집권 시절 많은 신자들이 죽었고 특히 여자들이 많이 처형당하였다고 한다. 아프리카 북부지방의 많은 나라들은 샤리아로 인하여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이 심각하다.

 

현대 이슬람 원리주의의 궁극적 목표는 세계정복이다. 9.11테러 이후 아라비아의 한 이슬람 지도자는 만약 미국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미국은 이슬람 테러와의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공문을 미국에 보내었다. 2006 5월 이란 대통령도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내었다. “당신은 기독교 신자로 의인이 승리한다는 것을 믿지만 그러나 세계는 결국 알라를 다 신봉하는 방향으로 역사가 흘러간다고 공언하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부시 대통령에게 알라에게 굴복하라고 요구하였다. 빈 라덴 역시 9 7일자 공개된 육성 테이프에서 만약 미국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민주주의를 포기하면 이라크에서 전쟁을 중단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슬람 원리주의는 그들의 목표를 위해 폭력을 정당화한다. 테러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4) 테러를 수출하는 아라비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이라크 수상 누리 카말 알 말리키를 신뢰하지 않고 도리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매달 60~80명 이상의 수니파 테러분자들이 이라크로 가는 것을 막지 않고 방조한다고 불평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라크의 수니 그룹을 지원하고 나아가서는 이웃 나라 아랍 에미리트, 카타르, 쿠웨이트, 바레인 오만에게 수니 지원을 독려한다. 이것은 미국의 이라크 안정 정책과는 도리어 역행하는 것이라고 미국 관계자들은 흥분한다. 동시에 시리아와 이란 역시 이라크의 시아파를 지원함으로 이라크의 평화를 방해한다.

 

아라비아 출신 테러들이 이라크에 오는 경로는 먼저 시리아에 버스로 도착하여 시리아 안내자 의 도움으로 이라크에 밀입국하는 것이다. 그 다음 그들은 라마디 다리에서 자살 폭탄테러 교육을 받는다. 이라크의 자살테러 40%가 아라비아인이라는 것이 미국 당국자들의 설명이다. 물론 이들 모두 자살 테러자는 아니며 그 중에는 폭탄제조자, 암살자, 전략가 및 금전 제공자들도 있다. 사실 사우디아라비아는 역시 이들이 나중에 사우디아라비아로 귀국하여 자국 정부를 향하여 테러행위를 할 것을 우려한다. 마치 8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결국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세계복음주의 선교운동이 전개하는 전 세계복음화와 이슬람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전개하는 전 세계 이슬람화는 충돌이 불가피할 것이다. 그리고 그 충돌은, 이슬람 세계가 2020년까지 이슬람화하겠다고 목표로 정한 국가인 한국에서 가장 심할 것으로 예상된다.

 

(5)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 분석

이번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은 두 종교의 선교충돌 혹은 문명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 8 2일자는 이것을 아주 예리하게 분석하였다. 제목도 대단히 의미심장한 “한국 크리스천과 탈레반: 신앙들의 충돌”이다. 이 기사는, 한국 기독교는 자본주의, 민주주의와 더불어 한국 사회의 3위 일체를 형성한다고 이념적 분석을 했다. , “한국은 종교적 열정의 결과와 씨름해야 하는 반면, 탈레반은 알 카에다로부터 배운 사형집행과 자살폭탄의 방법을 재고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한국과 이슬람 원리주의 양자를 비교했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한국 교회와 선교에 중대한 도전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건이 보도되자 대부분의 언론들이 일제히 비난의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외국 언론도 이 사태를 한국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와 한국 기독교의 열정주의가 빚은 결과로 표현하였다. 일본의 일부 언론도 비판적 시각에서 보도하였다. 한국 기독교 선교를 일종의 문화적 기질로 즉, 극성스러운 한국인들의 기질로 해석하고 잘못된 열정주의로 일본선교까지 시도한다고 비난했다.

 

이번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를 통해 피랍자 가족들은 이중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들의 형제자매와 자녀들이 납치당하여 엄청난 마음의 고통을 당하면서 또한 피랍자 가족들에게 항의하고 비난하는 댓글들로 인해 고통을 당했다고 할 수 있다. 샘물교회가 엄청난 비난을 받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비난의 목소리를 요약하면 ‘가지 말라는데 왜 갔느냐’, ‘정부가 왜 구출하려고 노력하느냐’등과 함께 "행정소송을 하겠다", "심지어 순교 각오하는 유서까지 썼는데", "하나님이 헬리콥터를 보내는 것을 구경하자"는 등이었다. 또 비난자들은 정부 대 탈레반의 협상 막판에는 ‘피랍자 구출에 소요된 모든 경비는 샘물교회가 부담해야 한다’며 강도 높은 비난을 하였다. ‘왜 남의 종교 사람들에게 전도하느냐?, ‘해외에까지 가서 봉사해야 하는가?’와 같은 비난에는 사회적 질시의 감정도 개입되었다고 한 지성인 청년은 분석했다. , 젊은 나이에 전문 직종에 속해 있고 경제도 여유가 있기 때문에 해외에 자비로 나간다는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글은, 인질 구출 몸값이 200억 원이라는 외신(요미우리 신문)을 인용하면서 샘물교회가 교회당을 팔아서라도 부담하게 해야 한다는 "청와대에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한 고등학생의 댓글이었다. 그 학생은 "우리는 가난한 서민으로 살기 힘든데 왜 정부가 엄청난 돈을 주고 이들을 석방해야 합니까? 만약 탈레반에게 돈을 주면 그들은 이 돈으로 다시 무기를 사서 사람들을 죽일 것이고, 한국인들을 또 납치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들은 순교하러 갔는데, 하나님이 헬리콥터를 보내서 구하든지 하지 왜 정부가 나섭니까? 만약 정부가 돈을 주고 석방하게 된다면 샘물교회가 그 경비를 다 부담하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글을 썼다.

 

한국 언론의 보도들을 살펴보면, 샘물교회 신자들의 인질 사태에 대한 이들의 보도는 무언가 우리 사회의 여론조작 현상을 보는 것 같다. 단정은 좀 이른 것 같지만 기독교와 기독교 선교를 공격하기 위한 의도된 동기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우리 사회의 반기독교, 반미, 반자본주의 성향의 사람들이 이번 사건을 비난의 좋은 기회로 포착하고 마음껏 두드린 셈이다. 이들은 노골적으로 반기독교 감정을 나타내었다. 한국의 기독교를 ‘가진 자들의 종교’ 혹은 부르주아지 부류로 취급하며 해외 봉사 활동을 조소했다.

 

해외 언론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많은 부분에서 오도하였다. 일본의 한 신문은 이들은 소매 없는 옷에 부르카(차도르)를 착용하지 않은 채 아이스크림을 사 먹어 현지인들의 감정을 자극했다고 기재했다. 한국의 좌파계 한 주간지는 이들이 호화관광버스를 탔다고 하면서 그 버스 사진을 실었다. 피랍 다음 날 뉴욕 타임지는 가즈니 주지사의 말을 인용 보도하였는데, 그 것은 가즈니 주지사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이 아프가니스탄이 자기 나라인양 위험 지역을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고 너무 용감하게 여행하였다’고 비난하는 글이었다.

 

가즈니 주지사의 말은 마치 이들이 스스로 호랑이 굴을 찾아갔다는 인상을 주고도 남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달랐다. 사실 아프가니스탄 정부에서 가지 말라고 했던 공문은 파키스탄 페샤와르에서 카불까지 국도(육로)를 이용하지 말라는 내용의 공문이었다. 그래서 피랍자들은 이 지역에서는 항공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다른 지역은 그러한 공문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담당하던 기관은 비자를 위한 공문에 협조해 주었다. 그러나 이 담당자는 공문에 대해 정직하지 못한 인터뷰를 하였다. 결국 그의 책임자답지 않은 답변으로 한국 교회와 샘물 교회는 실제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가즈니 주지사 인터뷰와 버스 기사도 다 거짓이다. 이 점에서 아프가니스탄 주지사나 탈레반도 세계 언론을 마음대로 이용한 셈이다. 그러나 사실 모두 비난한 것만은 아니다. 칭찬도 있었다. 납치 사건이 일어난 다음 주간 타임지에는 한국인 피랍자들을 칭찬하는 글이 실렸다. 그 글에서 기자는 미국 청년들은 여름 방학이면 놀러 가기 바쁜데 한국 크리스천 청년들은 가난한 나라에 가서 봉사하던 중이었으니 이것은 멋진 일이라고 평하였다. 아울러 미국 침례교 선교학자 월리엄 와그너 박사는, 외국 교회의 언론들은 피랍된 한국인 봉사자들을 칭찬하는데, 왜 한국 여론은 도리어 이들을 비난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평하였다. 그는 한국 사회의 잘못된 여론을 정확하게 지적한 셈이다.

 

3. 결론

최근 한 외신은 현대 이슬람 원리주의의 대표주자인 탈레반과 알 카에다에 대한 소식을 전한다. 그들은 비록 미국에서 패했지만, 다시 아프가니스탄 동부 산악지대와 파키스탄 국경 지대에서 조직을 재정비하고 미국을 대항한 성전을 촉구하고 있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과 서구의 정통한 소식지는 현재 아프가니스탄에 남아있는 알 카에다는 주로 체첸인, 아랍인, 아프가니스탄 사람으로서 그 인원은 약 4~ 5천 명이 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들을 지원하는 자들은 주로 인도 카슈미르 분리주의자들, 파키스탄 정부가 불법으로 단정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Jaish-e-Mohammed, Lashkar-e-Tayabba and Sipah-e-Sahaba)과 과거 파키스탄 정보원들이라고 한다. 알카에다는 아프간 산악지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코카서스 산악지대에도 상당수 있는데, 이들은 미국을 대항하여 성전을 수행하면서 체첸 게릴라들과 더불어 러시아와도 성전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세계정복을 시도하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를 위하여 하루 1 5천만 원 이상을 이슬람 선교를 위하여 사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슬람도 그들의 안방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작년도 타임지는 이슬람 세계의 갑작스런 붕괴를 예고하였다. 이슬람 국가의 세속화는 그 범위가 너무나 깊고 광범위하다. 지도자들은 공개적으로 이것을 인정하지 않지만,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는 아랍 두바이는 이미 세속화가 심각하다. 두바이 시민들은 이슬람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말한다. 이슬람 국가 청년들은 이미 이슬람에 실망한 것으로 보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계속해서 이슬람을 옹호하는 언론이 강하다. 한국의 무슬림 학자들은 “우리는 중동을 돈으로 생각했을 뿐 문화로서 다가서지는 못했다”, “한국은 에너지의 90%를 이슬람 세계에 의존하고 이슬람은 80%의 가전제품을 한국에서 사간다”며 “이슬람은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슬람은 사랑, 관용, 평화의 종교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이슬람이 사랑의 종교라면 쿠르드 민족을 품어야 하고, 시아와 수니 간의 전쟁이 없어져야 하고, 이라크의 양 파가 경쟁적으로 테러를 수출하는 것과 아프가니스탄을 이슬람 국가가 도리어 혼란하게 하는 것을 중단해야만 하지 않은가?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라면 사회적 정치적 열매도 좋아야 한다. 하지만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독재, 부정부패, 미개발(일부), 인권 탄압, 타종교 탄압 등이 심하다. 갈등과 전쟁과 소요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다른 종교가 선교하는 것을 막을 권리는 없다. 하지만 이슬람 원리주의가 한국에 들어오는 것은 절대로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슬림들은 다른 종교인들과 평화적 공존을 해야 할 것이며, 아울러 한국에서 무슬림들이 자유롭게 이슬람교 선교를 하고자 한다면 그들 나라도 기독교 선교에 개방해야 한다. 선교에 있어서도 상호주의 원칙은 적용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