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장년설교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

기쁨조미료25 2007. 11. 6. 02:10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

                                   눅15:11-24절, 195.431.465장.말씀연구소 박봉웅 목사. 

 

  아버지의 품을 떠나 갖고 있던 것을 다 탕진하고 난 다음에 돼지우리 속에서 쥐엄열매라도 먹으려 했으나 얻지 못하고 절망적인 탄식을 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하며 절망하고 탄식하였으나 더 망설이지 않고, 스스로 돌이키며 말하기를,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로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18-20절)고 하였습니다.

  

  탕자는 정신을 차리고 자기 위치를 깨달아 집으로 돌아가기를 결단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스스로 불 신앙에서 돌이키라고 말합니다. 탕자가 제정신이 아니어서 불 신앙을 깨닫지 못하였을 때는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정신으로 돌아와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자기의 현재 앞에 죽음의 절망을 실감한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회개의 소요 중에 감정적 부분입니다. 진정한 자기 비참을 그대로 느끼는 체험적인 절망을 말합니다. 자기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환자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입니다. 겔18:20절에 "그 영혼은 범죄하여 죽었습니다" 그의 불순종(불신앙)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 현재입니다. 요 3:36; 딤전5:6절의 말씀대로 일락을 좋아한 고로 살았으나 죽은 자였습니다.


  돈을 사랑하여 일만 악의 뿌리에 박혀 미혹 속에 살다가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러 버린 자학자가 되어 버린 현재입니다.(딤전6:10절). 참 그의 영적 참상은 숨쉬는 송장이었습니다.(계3:1절).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란 말은 탕자의 심각한 자기 현재에 대한 절망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 간 결과로 죽음에 이르는 자멸의 위기에 이르고 만 자기의 현재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산다고 여기고 있을 땐 참 사는 맛을 모르는 자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죽는 줄로 알게 될 때 죽는 줄을 깨달을 때 참 사는 맛을 깨닫게 됩니다.

 

2.탕자는 스스로 돌이켰던 것입니다. 그는 불행의 원인을 자기에서 발견하고 스스로 돌아    가기로 했습니다. 탕자는 현재 자기의 처지에서 돼지 치는 일을 불평하거나 곁을 떠나버린 친구들을 원망하려 들지 않았고 자기를 객지로 가도록 내버려둔 부모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원인이 자기 심령을 깨닫는 것이 살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치려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는 풍랑을 만난 것이 자기 때문임을 인정했습니다.요나는 거기에서 스스로 돌이켜 큰 사명자가 된 것입니다. 만약 탕자가 돌이키지 않고 계속 돼지 치면서,

 

  살길을 찾으려고 하였다면 그는 영영 비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것이 살길이요 그곳에 행복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가 가로막고 있다면 빛을 찾아 돌이켜야 합니다.


  인생 행로에 어두운 그림자가 가로막을 때 돌이켜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탕자는 돌이킬 줄 알았습니다. 그는 흑암과 공허와 혼돈 속에서 헤매던 탕자의 생활에서 돌이켜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한 것입니다. 돌이키면 삽니다. 아버지께는 생명이 있습니다.

 

  사55:6-7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암5:4-6절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길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들도 하나님께로 돌이키어야 하겠습니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망합니다.  "사울"왕은 회개하지 못하여 망했습니다. "헤롯"왕도 회개하지 못하여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살아 믿음의 대사가 되었으나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회개는 자기 잘못을 알고 깊이 마음으로 뉘우치며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이 따라야 합니다.

 

3.탕자는 자기 죄를 깊이 뉘우친 것입니다. 18절에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하면서 탕자는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했습니다. 탕자는 자신의 죄를 알았습니다. 탕자는 아들 될 자격이 없는 허물 많은 죄인임을 깨닫고 아버지가 어떻게 대하든, 겸손히 낮은 자리에 서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모든 것을 뉘우치고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라고 겸손히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소녀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할 때 닭이 울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 통곡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리에서 죄인 됨을 알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세 종류의 신자가 있습니다.

 

   목사가 설교할 때 그 말씀이 부스러뜨리는 방망이(렘23:29)로 임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이 심령을 때리면 목사가 설교로 나를 때린다고 불평하면서 교회를 영영 떠나버립니다. 또 어떤 교인은 말씀을 듣다가 목사가 설교로, 자신을 친다고 하면서도 교회에 출석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성도는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을 듣지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며 겸손히 뉘우칩시다. 이제 나는 어떤 종류의 신자인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탕자의 자리에서 일어서서 돌아가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4.새로운 미래 앞에 비젼을 가진 것입니다. 18절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회개의 요소 중에 의지적인 것입니다. 선을 지향하는 목적상의 변동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죄악에서 떠나는 과감한 자기 결단이 수반됩니다.

 

   그의 미래에는 내 아버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풍족한 품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양식이 족하다고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그는 이제 모든 가치 척도를 바꾸게 됩니다. "내게 돌아올 분깃"에서부터 내 아버지께로 전환시킵니다.


  "내"라고 하는 가치 척도에서 "내 아버지"라고 하는 가치 척도로 전환시킵니다. "여기"라는 자리에서 "아버지의 집"이라는 자리로 바꿉니다. 주려 죽는 지경에서 양식이 풍족한 생명의 상태로 바꿈입니다. 정말 그는 탕자입니다. 더러운 탕자입니다. 배은망덕의 탕자입니다.


  불결한 탕자요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절망의 탕자였습니다. 그러나 탕자는 영원히 울어도 못다 울 절망만을 되풀이 할 탕자는 아닙니다. 아버지는 탕자의 영원한 미래입니다. 아버지는 탕자의 영원한 비전입니다. 아버지는 탕자의 영원한 활력입니다. 아버지는 탕자의 영원한 소망입니다.

 

5.아버지를 향한 과감한 자기 결단이 있었습니다. 1)"내가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동작입니다. "내가 일어나"는 정적인 상태에서 동적인 상태로 바꾸는 것입니다. 정지 상태에서 기동의 상태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소망의 결단입니다.

 

  절망의 도시, 탕자의 겉껍질을 벗어버리고 본연히 일어나는 재기의 모습입니다. 2)"아버지께서 가서 이르기를…" 하였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 속으로 가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먼 나라가 아닙니다.


  탕자 도시들이 아닙니다. 술이 아닙니다. 열락이 아닙니다. 창기가 아닙니다. 아버지께 갑니다. 결단의 목적이 확실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입니다. 잘되는 순서입니다. 기쁜 일입니다. 소망의 걸음입니다. 생의 목표, 생의 행방이 너무나도 뚜렷합니다. 아버지! 그는 우리 생의 목표입니다.

 

  3)죄인임을 고백합니다. 18절에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깊고 깊은 죄 의식의 폭로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바울적인 독백입니다(롬 7:24). 죄인이 자기 죄로 인하여 절망하고 있는 곳에 그리스도가 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하는 세리와 같은 기도의 심정에 주님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4)벌받을 각오를 하였습니다. 19절에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제 지은 죄에 대하여 벌받을 각오를 합니다. 그러나 그 벌이 오히려 그에게는 은혜같이 느껴졌던 것입니다. 자식의 권리를 포기합니다. 품꾼의 하나로 취급당하여도 아버지 집이 좋다는 은혜의 갈증 자기 겸손히 그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인생들이 죄인이면서도 죄인 아닌 것 같이 하는 이것입니다.

 

  죄를 지었으면서도 벌을 받기 싫어하는 이 일입니다. 그 죄의 벌을 대신 담당하신 예수를 받아들이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탕자는 벌받을 각오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벌은 없어진 것입니다. 주님이 대신 지신 것입니다. 이젠 그의 지식과 전 감정은 아버지만으로 충분합니다.

 

   5)결단의 행동화입니다. 20절에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하였습니다. 그의 결단은 대단히 성경적 이치에 부합합니다. 마음 속 인격의 지성소에서 벌어진 회개운동이 저렇게도 과감하게 죄악의 자리를 박차고, 아버지께로 용진 하는 행동의 결단을 수반하고 말았습니다.


6.자기의 과거 앞에 허무 절망한 것입니다.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라고 했    습니다. 이 말은 “그 자신에게 와서 보니”라는 뜻으로 의학 용어로 말한다면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난다는 말입니다. 탕자는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재검토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돈을 따라가다가 돈의 종착역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주인으로 아버지로 섬겨오던 돈이 그만 폭군으로 화해짐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도덕적 공백이요, 정신적 공백이요, 종교적 공백이었습니다. 자기 속에 의가 없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의 선의 족적(足跡)이나 열매가 없는 줄을 깨달았습니다. 자기의 과거는 텅텅 비어 있는 허공임을 절망하고 만 것입니다. 술 취함과 열락 속에서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소비적인 과거였습니다. 거기에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어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신본주의적 경제원리에로 과감하게 돌아가야 합니다. 오! 아버지여! 제가 돌아왔습니다. 만신창이의 알몸뚱이만 끌고 누더기로 몸을 가리우며 멀리 떠났던 죄인 당신의 불효자식이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를 저버린 죄인 괴수! 여기 돌아와 당신의 문간에 섰습니다. 온갖 것 다 받아 내 마음대로 살려고 떠났사오나 온갖 것 다 잃어버리고 빈 손 들고 아버지 문전에 서 있나이다. 오! 아버지여! 나 정말 먼 나라에서 돌아왔습니다. 거기서 허랑하고 방탕하였습니다.


  마구 살을 에이는 죄악의 찬바람 때문에 매맞으며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돼지 움막에서 괴로워 아버지 앞에서 살려고 내가 여기 왔나이다. 오! 아버지여! 나 정말 아버지가 그리웠습니다. 먼 나라 백성들에게 붙어사는 생활이란 너무나도 아팠습니다. 외로웠습니다. 서러웠습니다.

  

  아버지여! 나 미칠 듯이 목이 말라 생수로 목을 축일 아버지의 샘물 찾아 헤매었나이다.나 미칠 듯이 배고파 아버지의 집의 먹다 버린 빵조각이 그리워 울었나이다. 이제 허황한 골짜기에서 스치고 다쳐 터진 저를 맞아 어루만져 주옵소서 하는 심정으로 아버지께 돌아온 것입니다.

 

7.돌아온 탕자는 생각 이상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1)제일 좋은 옷을 입혔습니다. 누더기    를 걸치고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준비해 두었던 새 옷을 입혔습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의의 옷을 입게 됨을 뜻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누더기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힌 후에 아버지의 집에 거하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큰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함을 받고 주안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갈3:27절).


  또한 계19:8절에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새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라고 했습니다. 2)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가락지는 사랑의 표시입니다. 변함 없는 언약의 상징입니다. 결혼할 때 신부는 신랑이 주는 가락지를 손에 낍니다.

  

  신랑은 신부가 주는 가락지를 낍니다. 가락지는 금으로 만듭니다. 금은 믿음을 표시합니다. 믿음으로 만들어진 사랑의 언약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옛날 바로 왕은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혔다고 하였습니다.(창41:42절).


  모든 존경과 사랑과 위엄을 받은 것입니다. 3)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아버지는 탕자의 더러운 신발을 벗기고 깨끗한 신을 신겼습니다.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새로운 삶의 출발을 의미하며 사명자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성도는 평안과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엡 6:15) 아직도 세상 길에서 헤매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4)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았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배부르게 했습니다. 굶주려 돌아온 아들을 배부르게 먹이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영육간에 부족함이 없도록 넉넉히 채워 주십니다.(시23:1). 불신자는 밖에 있는 탕자요, 성도는 돌아온 탕자입니다.

 

  기쁨에 찬 아버지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15:24)고 했습니다.


8.말씀을 정리합니다. 사1:18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    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는 인간들의 범죄의 중하고 경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탕자 같이 돌아와야, 근본 문제가 해결이 되는 동시에, 영․육간에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큰 죄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1 하고 회개하기만 하면 사하여 주시고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는 자는 교만한 자입니다. 가장 작은 죄까지라도 철저하게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회개는 주님께 사랑 받는 길이요 축복의 지름길입니다. 나의 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