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제국은 오늘날 이란의 영토에 근거한 여러개의 제국을 서양에서 일반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을 페르시아 제국이라고 부르지만 그후로 1935년까지 이지역에 일어났던 여러개의 제국들을 서양의 역사학자들은 모두 페르시아 제국이라 불렀다.
이란에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운 페르시아인이 지배한 고대 오리엔트의 대제국(BC 550~BC 330)이다.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이란 남서부 지방의 옛 명칭 파르스(Fars)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곳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이 고대제국의 통칭이 되었다. BC 815년경 이란 민족의 한 지파(支派)가 우르미아호(湖)로부터 자그로스산맥을 가로질러 남하, 수사 북동쪽에 있는 파르수마슈에 정착하였고, BC 700년경에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 아케메네스가 수장이 되었다. 아케메네스의 아들 테이스페스는 파르수마슈뿐만 아니라 파르스지방을 영유(領有)하여 안샨왕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현손 키루스 2세(재위 BC 559∼BC 529)는 BC 550년 메디아의 수도 에크바타나를 점령하여 새로이 페르시아제국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신흥국가에 대하여 동맹을 체결하고 대항한 카르디아 ·리디아 ·이집트 가운데 그는 우선 BC 546년 리디아를 쳐서 수도 사르디스를 함락하고, 소아시아 연안의 많은 그리스계(系) 식민도시를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군대를 카르디아로 진격하게 함으로써 BC 538년 수도 바빌론을 무혈점령하고, 바빌론에 유폐되어 있던 이스라엘인을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으며, dbeory의 신전조영(神殿造營)도 허가하였다. 이와 같이 제국 내의 많은 민족이 갖고 있는 종교나 관습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은 이 왕조의 방침이었다. 따라서 이것이 페르시아 문화가 다른 많은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서아시아의 중심이었던 바빌론의 점령은 그때까지 변경 국가였던 제국을 일약 세계제국의 지위로 올려 놓았으며, 따라서 키루스 2세가 대왕으로 불리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다시 동방원정에 나섰으나 마사게타이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키루스 2세의 생전에 성취할 수 없었던 이집트 정복은 키루스 2세의 아들 캄비세스 2세에 의해 수행되었으나, 그의 원정 중 마기승(僧) 가우마타는 그의 동생 바르디아의 이름을 참칭(僭稱)하여 왕이 되고 왕년의 메디아의 세력만회를 꾀하였다. 캄비세스는 이 변고(變故)의 소식을 듣고 서둘러 본국으로 향했으나, 도중 시리아에서 실의한 나머지 자살하고 말았다.
캄비세스가 죽은 뒤 제국은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같은 일족(一族)인 다리우스 1세(재위 BC 522~BC 486년)가 질서를 회복시켰다. 그는 BC521년 가우마타를 죽여 국내 여러 지방의 반란을 차례로 평정하고 BC 518년∼BC 510년에 북서 인도에 침입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는 전국토를 20수주(數州)로 나눈 행정구획을 실시하여 각 주마다 사트라프라고 하는 장관을 두었으며, 징세(徵稅)와 병역(兵役)을 부과하였다. 또한 이 사트라프의 행동을 감시하고 중앙과 연락을 담당하는 ‘왕의 눈’과 이를 보좌하는 지방의 ‘왕의 귀’를 두었다. 이 사트라프제는 그 후 오랫동안 서아시아 제국에서 답습되었다.
다리우스 1세는 민족종교 조로아스터교의 주신(主神)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숭상심도 깊었고(그 편린은 그의 碑文에서 엿볼 수 있다), 전국 각지의 기술과 재료를 총집결시켜 파르스의 페르세폴리스에 여름 궁전을, 에람의 수사에는 겨울 궁전을 조영(造營)하였으며, 수도 수사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사이에는 전장(全長) 2,400 km의 왕도(王道)를 건설하고, 역전제(驛傳制)를 채용하여 각 역에는 역마(驛馬)를 상비함으로써 중앙정부의 명령을 신속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도로는 평상시에는 상업교역로로, 전시(戰時)에는 수송로로 이용되었다. 이 역전제도는 오랫동안 서아시아 제국(諸國)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화폐제도의 확립과 금화(金貨)의 주조도 실시하여 상품유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그는 BC 513년 도나우강을 건너 스키타이인을 치고, BC 492년과 BC 490년 두 번에 걸쳐 그리스로 원정하였다.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으나, 그의 위정자로서의 공적이 대단하여 대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부왕의 유지(遺志)를 따라 그리스와 전쟁을 시도하였으나 왕년의 지휘관 마르도니우스는 이미 죽어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그는 궁정 내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때 키몬의 평화체결로 그리스 원정의 결말을 보았다(BC 449). 그의 비문(碑文)에서는 아후라 마즈다 외에 토착신앙의 미트라와 아나히타의 신명(神名)을 처음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2세는 재위 수십 일 만에 암살되었고, 동생 다리우스 2세(재위 BC 424~ BC 405년)가 왕위에 올랐으나, 이 무렵부터 궁정의 내분과 지방의 반란이 빈번해지기 시작하여 국세의 쇠미(衰微)가 뚜렷이 드러났다.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즉위한 무렵 당시 소아시아의 장관이었던 동생 키루스가 그리스 원병(援兵)을 얻어 제위(帝位)를 빼앗으려 진공(進攻)해 왔으나, 바빌론 전방(前方)에서 전사하였다. 다음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시대에는 이집트의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이를 가까스로 진압하기는 하였으나, 다리우스 3세가 즉위한 무렵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 해협)를 건너 제국 깊숙이 동진(東進)하였다.
요원(燎原)의 불길과 같은 이 세력은 도처에서 제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페니키아에서부터 이집트를 제압, 다우가메라 전투(BC 331)에서 제국군대에게 결정타를 가했다. 즉, 양쪽 병력은 페르시아군(軍) 약 20만 명에 대하여 헬라스 동맹군은 약 4만 7000명이었다. 다리우스 3세는 코끼리 ·전차(戰車) ·기병을 중심으로 하여 2중으로 횡진(橫陣)을 폈으나, 헬라스 동맹군은 그 좌익(左翼)을 강습하여 다리우스 3세를 패주하게 하였다.
다음해 다리우스 3세(재위 BC 336~BC 330)는 빅트리아 총독인 베소스에게 암살되어 페르시아제국의 멸망을 고하였다. 이 싸움 이후로는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북서 인도에 걸쳐 아케메네스왕조의 영토 전체가 완전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유린되고 말았다.
위키백과, 두산대백과사전, 차석찬의 역사 창고 참조
>> 참고고리 : 성경지명 바사(Per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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