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일반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지리적 배경과, 정치적 배경, 사상적 배경, 종교적 배경으로 볼 수있다.
먼저 지리적 배경으로는 기독교가 발생한 팔레스틴은 길이가 150마일, 넓이가 60마일로 우리 나라 강원도보다 작은 땅이다. 동쪽으로는 넓은 아라비아 사막이 있고, 서쪽은 푸른 지중해 물이 출렁대며, 북쪽에는 해발 900피트가 되는 헤르몬 산에 항상 흰눈이 쌓여 있어, 거기서 흐르는 물은 갈릴리 호수와 요단강이 되어 남쪽 사해에 이른다.
정치적 배경에 있어서는 팔레스틴은 지정학적으로 볼 때 고대 세계에 있어서 근동에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독교가 탄생하던 당시 지중해 연안은 정치적인 통일을 이룩한 시기였다. 이 통일은 로마 황제 케사르의 공적이었다. 포에니 전쟁 이후로 귀족간의 투쟁과 빈민들과의 알력이 심하였다. 이러한 때에 우국의 청년 그락쿠이스 형제가 호민관으로 선출되어 빈민을 위해 크게 힘썼다. 여러 가지 사건 후에 케사르는 귀족 출신으로 빈민당의 수령이 되었고 황제가 되어 모든 귀족들 위에 올라 특이한 존재로서 귀족과 평민 사이에 조화를 도모하였다. 당시 로마는 정치와 법의 질서로 말미암아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사상적 배경으로 희랍 문화는 로마의 정치적 이상이었던 동시에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로마 시대에 성행하던 희랍철학으로는 에피쿠로스 주의와 스토아주의가 있었다. 에피큐리안니즘은 행복은 쾌락이라고 생각하였다. 에피큐로안니즘이 행복을 인간의 목표로 삼는데 반하여 스토아 주의는 종교적 색채를 많이 띠었다. 다음으로 종교적 배경에서 보면 일반 종교와 유대교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 여러 지역과 도시들은 각기 고유한 수호신을 신봉하며 제사와 의식을 행하여 왔다. 공화정 시대부터 로마 국가를 신성화하여 숭배하였고 기원전 29년에는 국가와 황제를 위하여 신당을 세웠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는 유대교의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그들을 통해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신다고 한다.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살펴보면 예수는 자기가 한 사업에 대하여 자신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며, 또한 자서전도 쓰지 않았다. 기독교의 변증과 전도를 위해서도 기록이 필요했다. 신약성서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쓴 4복음서가 있는데 그 중 역사적으로 보아 최초의 복음서는 마가가 기록한 「마가복음」이다. 마태, 마가, 누가의 세 복음서를 공관 복음서라고 부른다. 4복음서는 역사적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보여 주며, 역사 이상의 계시적 의미를 시사해 주어 하나님이 보여주시려는 신의 계시를 접하게 한다. 예수의 유년기와 소년기의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사료가 극히 빈약하다. 예수는 세례를 받은 후 40주야로 금식하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뒤 천국 복음 을 전파하는 역사를 시작하였다.
예수는 종교의 순수성을 부르짖는 나머지 형식적 전통에 구애받지 않았기 때문에 기성 종교인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서 기성 종교인들과 집권자들은 구실을 만들어 예수를 없애려 하였다. 후에 예수는 로마의 형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형인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하였다. 예수는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을 고조하여 회개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데서 '현자' 여기에 임재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는 어린 아이와 같이 순진하고 순종하는 자라야 한다고 가르쳤다. 예수는 유대교의 전통인 유일 신관을 전승하였다. 그는 결코 신의 존재를 논증하려 하지 않고 그 자신의 삶으로 신의 성품을 드러냈을 뿐이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 그의 제자들은 절망과 공포에 싸여 제각기 옛날의 일터로 흩어졌다. 그러나 불과 두 달도 못되어 다시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예수의 제자임을 공언할 뿐만 아니라 그를 죽인 죄를 책망하여 그를 믿고 속죄함을 받으라고 설교하였다. 이 엄청난 변화는 예수께서 다시 살아 나셨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었다.
우리는 한 인물의 독특한 배경과 기원을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점점 뒤로 소급해 올라가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의 십자가의 형에, 다음은 그의 죽기까지의 복종, 그의 세례, 그의 탁월한 소년기의 성장, 기적적인 탄생,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의 영원 전부터의 선재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예수는 놀랐던 제자들을 위로하여, 그들로 하여금 앞으로 강림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역군이 될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스도의 분부대로 약 120명에 달하는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한 집회소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모임이 열흘째 되던 오순절, 아침, 드디어 그들은 강렬한 성령의 강림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이후 예루살렘의 조그마한 다락방에서 시작된 교회는 새로운 선교 열을 가지고 이방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아직 팔레스틴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독교를 당시 희랍 로마 세계에 소개한 선교자였다. 바울의 본명은 사울인데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감화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다소시에는 스토아 철학 사상이 성행하여서 희랍적인 사상에도 계발되었다. 사울은 정통 히브리 종교의 출신으로 유대교의 율법 교육과 아울러 희랍철학에 의하여 배양되었고 식민지의 천민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시민으로서 위대한 사도요 신학자요 전도자의 재질을 갖춘 사람이었다.
사울은 율법의 요구에 대한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고 인격의 파괴가 심각하면 할수록 사울의 종교적 열심은 더욱 더 필사적이었다. 그러한 결과는 그리스도 인에게 대한 박해로 나타났다. 바울이 부하들을 이끌고 다메색 성내에 피난한 그리스도 인을 전멸하려고 하여 다메색 성에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급격한 변화가 그에게 임하였다. 다메색 도상에서의 사울의 경험은 그의 내적 투쟁에 결정적인 해결을 주었다.
사울은 개종한 후 이름을 바울로 고치고 조용한 곳을 찾아 아라비아로 갔다. 이 이유는 아마도 예루살렘의 동료들의 비판과 박해가 두려웠는지 혹은 새로운 신앙에 대한 더 깊은 명상과 기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최초로 대규모적인 이방 선교를 하였다. 바울은 허다한 박해와 고난을 넘어 대규모적인 이방 선교를 하였다. 바울은 실천적인 신앙가였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신학자였다. 유대교의 훈련과 희랍철학의 소양은 기독교 신앙과 결부되어 바울의 위대한 사상과 저술을 낳게 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등 양적으로도 신약성서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질적으로도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 바울의 신학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교회에 거대한 영향을 주어 왔다.
고대의 기독교
바울과 신도들의 선교로 기독교는 지리적으로 국한된 팔레스틴의 테두리와 유대교적인 전통의 제약을 벗어나 당시 서구를 통치하던 로마제국으로 진출하였다. 따라서 새 터에 싹트는 교회는 어느덧 그 제국을 형성한 성시 중심인 제도를 채택하기 시작하였다. 전체적인 교직이 있는 반면에 각 지방마다 지방의 교직 제도도 병립하여 왔다. 세월이 지나자 지방 교직 제도가 전체 교직 제도를 대신하게 되었다. 교회의 조직이 달라짐에 따라 예배 형식도 변하였다.
기독교가 처음 박해를 받기는 네로 황제 때였는데 그것은 예수 교인이라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방화하였다는 혐의로 된 것이었다. 기독교를 박해한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사교를 배척하여 황제를 신으로 예배하기를 거절한 데서 무신론자, 무정부주의자로 생각했기 때문이며, 그리고 성만찬을 거행할 때 교인들만이 비밀리에 모여 살과 피를 먹는다고 하여 식인종으로 오해했으며 남녀가 비밀히 모인데서 불미스런 행동을 한다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이런 박해에 대해서 기독교인에 대한 일반의 오해와 로마 정부의 적대적 태도에 대하여 기독교를 변호, 변증한 이들을 호교론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부당한 오해를 반박하는 동시에 그 당시의 지식 계급을 개종시키려는 데도 노력하였다. 박해와 아울러 2세기경에는 인접 지역의 이교 교리가 기독교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단 사상의 압력 하에서 기독교는 그 신앙을 이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이것이 '사도 신경'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교회는 3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그의 새체제에 적당한 교리를 설정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은 서방에 있어서 터툴리안이고 동방에 있어서는 오리겐이었다.
기독교는 이같이 박해와 소란을 겪었지만 때마침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 제국의 패권을 잡게 되자, 그의 정치적 성공을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믿고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콘스탄틴은 이 전 황제들과 같이한 국가, 한 황제, 한 종교를 이상으로 삼아 기독교를 제국의 유일의 종교로 등장시켜 교회와 정부가 상호 의존하게 되었다.
교회 내의 논쟁이 황제의 간섭으로 인하여 좌우되는 반면에 논쟁의 중심 세력을 이루는 감독들의 정치적인 위치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다.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후에도 모든 군소 교회들의 감독들은 각각 동등한 권위와 세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대도시의 대사교의 세력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일반 민중의 오해와 로마 정부의 가혹한 박해를 받아 오던 고대 기독교인들은 힘차게 싸워 수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했으며, 이로 인해 완전한 신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중세의 기독교
중세 교회는 어거스틴이 '신의 도성'을 그들의 이상으로 정하고 '지상의 천국화' 하려고 하였다. 어거스틴이 그의 이상적인 신의 도성과 현실적인 카톨릭 교회를 동등시하는데서 은연중 교회의 역사적 소임을 암시하여 준다. 중세 교회의 구체적인 목표는 북구 민족들이 서로마 제국에 침입할 무렵 카톨릭 교회는 그 민족들에 대한 선교와 교화에 주력하였다. 중세 교회는 교인을 성례로 다스렸다. 성례란 것을 어거스틴은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은혜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평신도들은 교직자들이 성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주는 것으로 믿어 교권과 성례에 서로 호응하게 되었다.
중세 교회는 치밀한 조직으로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수도사, 교직자, 신학자, 교회 법률가들로 되어 있었다. 수도사는 수도원을 중심 하여 발달되었고, 교직자들은 수도사가 수도원에서 나와 교회를 받들기도 하니, 교회 내에서 수련을 받기도 한다. 다음으로 교회 법률가들은 표면상 별로 드러나 있지는 않으나 은밀한 가운데 교황을 도와 황제와 다툼이 있을 때 법적 근거를 때로 조작하여 교황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신학자들은 수도원에 간직되어 온 고대 신학과 철학을 전달하여 주었다.
중세 기독교는 13세기에 이르러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프랜시스와 도미닉의 두 탁발 수도단이 조직되어 경건한 생활과 사회 정화를 고취하였다. 교황 인노센트 3세는 교권을 최고도로 확장하였으며, 스콜라 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렇게 13세기의 기독교회는 전 구라파의 정신적, 정치적 지배자로서 어거스틴의 이상을 거의 구현하였다.
13세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던 중세 교회는 다시 차츰 붕괴되었다. 전일에 완성한 토마스 신학은 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정.교 일치의 이상도 제국의 문란과 교황청의 분열로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문예부흥과 종교개혁
문예부흥은 중세에서 현대로 옮겨오는 획기적인 중요 계기였다. 이러한 변혁을 이어 종교도 새로운 기운으로 움트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종교개혁 운동이었다. 문예부흥은 14세기 이태리에서 시작되었고 이 운동의 선구자는 주로 문학가들과 교육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상대는 지식층이었다. 문학과 교육을 목표하여 시작한 문예 부흥 운동이 언어학과 역사학에도 옮겨지자 전에 성행하던 논리적 면을 떠나 역사를 움직이는 힘, 즉 의지면을 강조하게 되어 생의 의욕을 한층 촉구하였다.
문예부흥과 더불어 인쇄술의 발명과 신대륙의 발견이 있었다. 문예 부흥 운동은 주로 지식층과 상류계급에 한하여 전개되었고 일반 대중들은 그 영향을 받지 못하였다.
급격한 사회제도의 변천과 더불어 종교개혁 운동이 위클리프, 보헤미아후스등을 통하여 시자고디어 루터에 와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1517년에 교황청은 성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하여 속죄권을 판매하였다. 이에 루터는 95개 조문을 작성하여 속죄권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이 조문은 독일에 퍼져 파문을 던져 주었다. 교황은 그 조문을 곧 철회하라고 했으며, 교황에게 절대 복종하겠다고 서약한 수사로서 복종치 않을 수 없었다. 이때 프레드릭 선제후의 보호로 처분을 피할 수 있었다.
종교개혁 운동은 독일의 인접국인 스위스에서도 일어났다. 비록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문예 부흥의 영향을 받은 자유로운 연방국으로 이러한 개혁 운동을 갖게 되었다. 주도 인물은 쯔빙글리였다. 쯔빙글리는 개혁자 중 정치적 수완을 구비한 사람이었다. 그가 카톨릭 연맹과 투쟁하다가 전사하기는 하였으나 그가 시작한 스위스의 개혁 운동은 계속 발전하였다.
냉철한 이성과 조직적 두뇌를 가지고 혼잡한 개혁 사상을 체계화하여 개혁파 신학의 기초를 확립시킨 사람은 칼빈 이었다. 칼빈은 루터와 쯔빙글리등 신교파의 2대 세력을 규합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 그리스도가 영으로 우리 마음에 임재하시는 것을 성례가 상징한다고 하는 절충적인 입장을 취하는 데서 그 양자간의 차이점을 조화해 보려고 하였다.
근대의 기독교
신성로마 제국이 존재하는 한 제왕과 교황의 세력하에서 루터가 몇몇 제후와 결탁하여 종교 혁명을 일으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구교 내부의 부패와 국수주의의 대두로 제국의 분열이 없었으면 루터의 운동이 뿌리를 박기 힘들었을 것이다.
구교회는 날로 증가하는 불란서 신교도들을 제거하기 위해 1559년 성바돌로매 제이르이 파리에서만 8천명이나 학살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신도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불란서를 채 신교화 하지는 못했으나 1598년에 낭트 칙령에 의하여 신교의 자유를 얻었다.
영국에 있어서는 헨리 8세의 종교개혁으로 성공회를 설립한 후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 때 일대 혁신을 해보았으나 몇 년이 못되어 그의 누이 메리가 왕위에 오르자 이와 반대로 극단의 교구로 기울어졌다. 엘리자베드 여왕때 서반아의 무적 함대를 쳐 무찔러 구교가 영국을 다시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16세기의 개혁자들이 전통을 버리고 신앙에만 의존한 데 반하여 17세기에는 이성을 통하여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하려는 영국의 자연신교와 불란서, 독일의 계몽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신학을 이성 하나로써 세우려 하였다.
칸트는 우리 사람들의 마음에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에 대하여 어떤 특정한 형을 꾸며 주는 상대적인 고유한 성질이 있다고 밝혔다. 칸트는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외재한 물건 자체 혹은 실재를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을 알게 됨에 불가하다고 하였다.
슐라이어머하의 종교관은 종교란 사유만도 아니고 행위만도 아니며 양자가 분립되지 않는 상태에 놓인 직관이라 했으며 종교의 본질은 신에게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인데 거기에는 신.인이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 뒤를 이은 리츨은 역사성을 새롭게 강조하여 인문 과학과 신학의 기초를 삼았다. 리츨은 역사를 중시하였지만 헤겔은 역사의 본질을 변증론으로 설명하였다.
새로이 역사 위에 등장한 미국의 기독교는 근세 기독교 발전에 큰 몫을 차지하였다. 제퍼는 대통령 시대의 미국 신학은 청교도들의 칼빈 주의적 경향에 동조하고 있었으나 여기서도 자연 신교적인 유니테리안주의와 대결하게 되어 심각한 변도의 고비를 넘게 되었다. 설교가 무디와 같은 인물들의 영향으로 많은 청년들이 세계 선교에 헌신하게 되어 세계 선교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의 제 종교
한국의 종교적 특징은 종교사적으로 보아서 진화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것이 현재에도 종교적인 복합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독특한 배경이다. 기독교는 한말의 긴박한 국제적인 시련 속에서 그 자주성을 추구한 조선에 근대적인 자각을 동반한 민족의 에너지를 부여할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종교적 신앙의 세계를 새롭게 열어 주는 구실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는 근대 한국에서 막강한 힘으로 겨레 전체에 퍼져 나갈 수가 있었다.
한국에는 예로부터 무교, 곧 샤머니즘이라는 원시 종교가 있었다. 무교가 한국에서 전개된 과정을 보면 첫째로 공동 제례인 부락제가 그 처음 발전의 형태이다. 다음은 개인 제도로서의 무당굿이다.
말기에는 세상이 험해짐에 따라 다시 개인 제재 초복의 신앙으로 여러 외래 종교의 수용 과정에서 묘하게 그 기본 요소를 간직하는 형태로 남아 온 것이다. 이런 고귀한 윤리적 가치의 결여, 내세 심판 사상의 부재, 초월적인 신관의 부재, 이런 여러 문제들로 해서 극복되어야 할 원시 종교임에 틀림없다.
불교에 대해서 살펴보면 불교는 한국에 처음 들어왔던 외래 종교이다. 이 종교는 석가모니가 도달한 불타가 되는 길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불교의 근본 사상은 법, 곧 연기와 사성제, 팔정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불교는 석가의 제자들에 의해서 교단, 곧 승가로 발전하였는데 귀족적이요 은둔적인 부파불교를 소승 불교라 하고, 대중 쪽에서 일어난 개혁 운동은 대승 불교라 부른다. 한국에는 4세기 말경부터 불교가 전래되었고 신라 때에 와서 꽃을 피우게 된다. 또 한가지 유교가 있는데 유교는 윤리 도덕의 학문으로서의 유학이요, 다른 하나는 공자와 조상을 받들어 섬기는 종교로서의 유교이다. 유교 윤리 사상의 근본은 수신제가 평천하란 말에 잘 표현되고 있다. 한데 이러한 윤리적 수양은 인과 효라는 두 덕에 집중돼 있었다.
우리 나라에 유교가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의 일이고 부흥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충렬왕 이후이다. 조선조에 이르면서 유교는 빛나는 발전을 이룰 수가 있었다. 태조의 숭유 억불 정책이 불교의 퇴조와 함께 유교의 황금시대가 시작되었다. 실학자들에 의해서 서양의 기독교가 처음에는 학문으로, 다음에는 신앙으로 받아들여지데 되었다. 한국 기독교의 시작이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 이 까닭이다.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의 기독교회는 고립되어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아득한 옛날부터 세계 교회와의 접촉이 있어 왔다. 더구나 기독교와 한국과의 접촉은 한국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때에 있었다는 우연이 특징이었다. 한국 기독교와 세계 교회와의 모든 접촉은 우리의 비극의 순간에 기독교가 우리의 문을 두들겼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아직 때는 성숙하지 못하고 있었고 18세기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의 시련의 날에 그 복음이 전해져, 이 겨레의 생존과 그 영광을 지탱하는 힘, 그것으로 현존하는 형식으로 선교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국은 임진왜란과 심전도의 비극 소현세자의 인질 피납등으로 비극적인 역사를 거치면서 한국 유교도 심각한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의 실지 연구, 실증 실용의 학풍이 그것이었다. 실학이 바로 이 경향을 포괄하는 실사구시를 목표하고, 그 체계를 굳혀 갔던 것이다. 이 실학자들이 필경 기독교의 서구 문명에 기민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그 핵심인 기독교 신앙에 대한 검토가 병행할 수밖에 없었다. 1784년 이승훈은 북경에서 공개리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신앙인이 되었다. 귀국한 이승훈은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고 5년이 되던 해에는 신도들이 4천을 넘었다. 이렇게 시작한 한국인 자신들에 의해서 영도되어 시작된 한국 교회는 처절한 역사적 체험 뒤에 있었던 것이고 발전 과정에 있어서도 수많은 박해를 받았다.
근대 동서 교섭의 통로로서의 기독교를 살펴보면 한국의 전통 문화와 기독교와의 만남은 결국 동서 교섭의 형식으로 전개되었고, 따라서 그 유형 검토에서 기독교의 선교를 취급하는 것이 바른 경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개신교가 전도되던 때의 한국은 그 상황이 세 가지 특별한 조건으로 싸여 있었는데 하나는 카톨릭 교회가 남긴 대역 모반의 인상이었고 둘째로는 근대 한국에는 묘하게도 종교의 진공상태가 조성되고 있었다. 역사상 전성했던 선이나 불교 및 유교의 정신적 차원은 고갈돼 있었고 따라서 민중의 종교적 갈망은 채워질 경로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국내외의 급격한 혼란의 만연이었다. 이처럼 새 정세의 전개 때문에 그 무력이 노출된 채 어디에 기댈 곳을 찾아야 했던 난국이 바로 개신교가 선교되던 때의 형편이었다. 우리 나라에서의 선교 실현의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 나라의 국수적 전통의 도전에서 예수교의 도입은 겨레에 대한 우리 나라의 국수적 전통에 촉매로 한 일치감에서밖에는 실현될 길이 없었다. 1895년은 겨레의 비애가 사무쳤던 해이다. 청일전쟁이 이 강토를 황폐하게 하고, 뒤따라 괴질이 전국을 참혹하게 휩쓸었으며, 민비는 그의 침전에서 일본의 낭인들에 의하여 참혹하게 시해된 해였다.
그런데 기독교의 한국 정착은 이러한 비극을 통해서 수행되었다. 나라와 백성, 그리고 한 인간의 그 자주를 북돋아 주는 동행의 에너지로 기독교가 소개되었고, 그것이 비극의 무대에서 절실하게 성숙해 갔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 소개된 기독교회는 대개 미국적인 교파 교회로 범주화할 수 있는 경건주의 형태의 교회들이었다. 따라서 여러 교파가 함께 소개되었고, 그런 형편 아래에서 단일한 민족 교회의 형성은 어려웠다.
19세기 말엽의 한국 기독교는 그것이 나라나 겨레에 유용하다는 관념에서 현상적으로 수용되었음이 사실이다. 1905년 을사 보호조약 체결 이후 교회는 국제적인 관계를 통하여 이 국권 상실의 비극을 방지하고자 사력을 다하였다. 일제의 득세로 인해서 좌절과 절망감이 휩쓸 때 교회는 복음의 강력한 호소나 또 교회가 가진 국제적 유대 관계나 국내에서의 전국적 조직망으로 해서 겨레가 등 기댈 곳으로 알고 찾아갈 최후의 보루처럼 보였다. 기독교인들을 주축으로 일제에 대한 반항에 일제는 반일 저항의 거점이 한국의 기독교회라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3.1운동에서 교회는 뜻깊은 일들을 하였다. 순교와 압제의 36년은 한국 교회에 대하여는 그 성격 구형기에 해당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순수한, 십자가의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을 마련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해방은 한국 교회의 성숙과 함께 맞아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이처럼 1895년 이후 일제의 침략과 그 식민, 그리고 통치에 대한 저항 동력으로 계속 현존하면서, 자유 민권론과 신부 인권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사라지지 아니하는 소망의 불길을 비치어서 민족적 생명의 부활을 약속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현대와 기독교 사상
기독교의 전통적 신관을 가리켜 우리는 유신론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유신론은 기독교가 희랍의 문화권 속에서 선교되면서 형성되었다.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과 희랍철학이 추구하는 하나님이 동일시되었고 여기에서 형성된 신관이 소위 말하는 기독교의 전통적 유신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의 참 하나님은 이 세계와 존재 유비를 가지고 있으며 이 세계에 속한 사물들과 비교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이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분이다. 성서의 하느님은 단순히 이 세계에 대하여 다르고 초월하신 분으로 머무는 분이 아니라 초월하신 분으로서 끝까지 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은혜의 선물이라 결코 존재론적 소여를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초월함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피조물과의 관계의 역사성, 그리고 성령 안에 잇는 이 관계의 현재성을 요약한 것이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이다.
기독교의 인간 이해
인간학의 유형들을 살펴보면 생물학적 인간학과 종교적 인간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생물학적 인간학은 인간을 결핍의 존재요 비 결정성의 존재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간의 결핍성과 비 결정성은 인간의 활동성과 창조성을 의미한다. 문화 인간학은 인간을 문화의 피조물이요 동시에 창조자라고 생각하고 상이한 문화의 컨텍스트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상호 비교함으로써 "인간이란 무엇인가?"애 대한 질문에 답변하고자 하는 인간학을 말한다. 종교적 인간학의 내용은 기독교 내에도 있으나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나 철학의 내용이기도 하다.
기독교의 인간 이해에 대해 살펴보면 인간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본다. 기독교는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를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의 중심주의 적 인간 이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주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런 기독교의 하나님 중심 주의는 인간을 약화시키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 인간학은 인간 중심주의를 말하고 있다. 또 인간을 죄인으로 보고 있는데 에덴 동산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은 데서 기인한다. 반면에 인간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기독교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진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철저한 사랑의 대상이며 구원의 가능성, 참된 생명의 가능성이 그 앞에 열려져 있다고 말한다. 다음으로 인간이란 하나님의 부름 받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십자가에 그의 참된 존재 규정을 깨닫는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전파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사자가 될 사명을 가진 자, 곧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가 된다. 인간의 존재는 완전히 답변될 수 있는 완성의 것이 아니라 미래에 완성될 성질의 것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의 세 유형을 살펴보면 첫째 형태는 희랍 철학적인 신관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하나님은 영원한 존재인 반면 인간은 일시적인 존재이며, 전자는 변화될 수 없는 존재인 반면 후자는 변화될 수밖에 없는 허무한 존재이며, 전자는 고통을 받을 수 없는 전능한 존재임에 반하여 후자는 고통과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라고 이해되었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이후부터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변천되었다. 즉 인간이 이 세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인간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중세기의 종교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인간은 이 세계의 주인으로서 세계를 개척하고 지배하는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모습은 하나님 나라의 선취자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대리자로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적 말씀을 살펴보면 마가복음 1:15절에서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즉 하나님의 나라가 된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의 완성인 동시에 목표로서의 의미를 증명 받았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을 구원해 주는 분이심을 믿는 것을 뜻한다. 신앙은 유일한, 나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인격에 관계된 것이므로, 신앙의 현실은 첨가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도리어 나누일 수 없는 인격과 관계하고 있는 나누일 수 없는 행위로서만 이해할 수 있다.
신앙은 인간이 스스로 안전해 지려고 하는 노력이 아니라 다른 인격을 위한 개방성이다. 오늘날 과학과 기술이 발전되고 인간의 지혜가 더욱 개명되면서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 너는 때보다도 강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역사적 과정 속에서 내맡겨져 있었기 때문에 인간 존재의 의미를 그 역사성 속에서 찾고자 하였다. 기독교적 종말론이 역사 이해를 위하여 특출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종말론은 최후의 사물에 관한 교의학 적인 진술이다. 종말의 문제는 인간의 부활과 영생에 관한 것과 세계의 종말과 완성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종말에 대한 성서적 관점은 미래 적인 면과 우주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
다음으로 개인의 종말과 세계의 종말에 대해서 살펴보면 개인의 종말은 죽음으로 볼 수 있다. 기독교가 전래되기 이전에도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인생의 죽음과 내세 그리고 역사의 변천과 말세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이러한 재래적 말세 사상이 은연중에 기독교의 종말론과 결합되어 한 편으로는 기독교 선교에 크게 이바지한 바도 있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기독교 선교의 암적인 존재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그 안에 신비적 성격을 지닌 채 이 역사 속에 2000년이라는 시간을 살아오고 있다. 교회의 생명력과 그 신비적 역동력의 경험은 교권주의적인 해석에서보다는 오히려 기독교 적인, 혹은 종말론 적으로 해석하는 교회관에서 더욱 의미 있게 이해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들이 현대 신학의 내적으로 흐르는 한 가지 의미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라는 궁극적인 사건에 의하여 비롯된 후속적 공동체란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선 세계 교회들은 무한대로 확산해 가는 교회의 성장을 신의 역사라고 찬양하면서도 다른 한 편 각 교파마다의 선교적 열정으로 과열된 경쟁은 교회간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켜 간 역설적 상황에 까지 이르면서 그들 사이에는 참 교회를 모색해야 한다는 열망이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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