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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위대한 패배자 / 볼프 슈나이더 지음

기쁨조미료25 2007. 10. 24. 16:59

위대한 패배자

― 한 권으로 읽는 인간 패배의 역사 ―

볼프 슈나이더 지음

을유문화사 / 2005년 9월 / 400쪽 / 15,000원

   

들어가는 말

 

몇 사람을 제외하고 우리는 모두 패배자다

‘종(種)’으로서 인간은 진화의 무수한 굴곡을 넘어온 고독한 승자이지만, 개인으로서 인간은 모두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들에 가깝다. 오늘날에는 대개 한 사람의 승리자만 있고 나머지는 대부분 패배자들이다. 경쟁이 노동 시장뿐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욕망을 지배하고 더 나은 세계에 관한 만병통치약처럼 찬양되면서부터 자신이 승리자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수십 배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20세기 문턱까지만 하더라도 대다수 사람들은 가난과 굴종을 바꿀 수 없는 질서나 하늘이 정한 이치로 생각하며 묵묵히 감수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돈과 권력, 명예, 명성, 메달을 향해 끊임없이 경쟁을 벌이는 체제로 바뀌었고, 그로 인해 다수가 낙오하고 패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책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맞선 인상적인 패배자도 있고, 끝까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며 자신의 비운을 인정하지 않은 나쁜 패배자도 있으며, 권력에 빌붙거나 경쟁자의 뒤통수를 칠 정도로 비열하지 않았기에 패배했고, 그래서 절망하지 않은 훌륭한 패배자들도 있다. 공화주의자 마르쿠스 포르시우스 카토(Marcus Porcius Cato : 기원전 234~149년 로마의 정치가이자 웅변가)는 카이사르와 벌인 싸움에서 패한 뒤 뭐라고 했던가? “승리는 신들의 것이고, 패배는 카토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깨끗하게 승복할 줄 아는 아름다운 패배를 배워야 한다. 이 책 역시 그러한 목적으로 씌어졌다. 우리는 위대한 패배자들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깨닫는다. 그들은 우리들 대부분이 겪는 좌절의 아픔을 함께 겪었지만, 그 운명을 비극으로 승화시킬 줄 알았다.

 

영광스러운 패배자들

 

고르바초프 ― 다른 민족은 해방시켰지만 정작 자신의 제국은 잃어버린 남자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는 자신의 쉰네 번째 생일 아흐레 뒤인 1985년 3월 11일에 소련공산당 정치국 서기장에 지명되었다. 그러나 불과 6년 뒤 그는 이 제국이 해체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역사상 고르바초프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정치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어떤 이들은 그를 가리켜 “승리자, 진정한 몽상가, 해방자”라고 칭하지만, 일각에서는 “패배자, 파괴자, 철모르는 바보 천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삶을 추적해 보는 것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다.

 

고르바초프는 1931년 러시아 연방 남서부 스타브로플 지구의 한 마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들 가운데 한 사람은 1년 동안 감옥에 갇혔고, 다른 사람은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스탈린의 살인적인 강제집단화 정책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는 열다섯 나이에 국영농장의 콤바인 기술자로 일했다. 여기서 성실함을 인정받아 적기훈장을 받았고, 그것을 계기로 1950년에 모스크바로 이주해서 법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졸업장을 손에 쥐고 스타브로플로 돌아와서 콤소몰(공산주의청년동맹)의 간부가 되었고, 1966년에는 시당위원회 1서기, 1970년에는 도당위원회 1서기에 올랐다. 여기서 국가보안위원회(KGB) 의장이던 유리 안드로포프를 만나게 된다. 이 인연을 계기로 최연소 정치국원인 고르바초프에게 소련공산당 서기장직이 돌아갔다.

 

그는 서기장직에 오르자마자 소련 인민은 물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볼셰비키주의적 원칙을 흔들림 없이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노동과 당과 국가의 엄격한 기강을 요구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새로운 사고’를 부르짖으며 글라스노스트(개방, 투명성, 서구 여론에 대한 신중한 접근)와 페레스트로이카(국가, 당, 경제의 총체적 개혁)를 천명한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미국과의 군비 경쟁에서 절대 소련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반 인민들은 단순한 생활필수품마저 부족해서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었지만, 국가는 허황한 군비 경쟁을 위해 매년 1,000억 루블을 쏟아 붓고 있었다. 결국 그로서는 긴장완화를 모색하고 냉전을 종식시키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결정은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국내 경제가 궁핍해서 내려진 것이었다. 고르바초프는 통찰력과 결단력 그리고 과감함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이후 3년(1987~1989) 동안 세계 정치의 주역이자 서구 세계가 가장 선호하는 정치인으로 급부상하였다. 고르바초프는 1987년 12월에 레이건과 만나 2,700여 기의 중거리 핵미사일을 폐기하는 데 합의했다. 세계 평화로 나아가는 작지만 의미 있는 발걸음이었다. 1945년 이후 어느 정치인들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경제 부문에서는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고, 무사안일과 부정부패 척결을 부르짖었다. 그밖에 소규모 자영업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또한 고르바초프는 동구권의 위성국가들이 소련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정당화한 브레주네프 독트린(1968년)을 철폐한 것이다. 이와 함께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신의 문화와 실정에 맞는 사회주의를 건설해 나갈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사회주의가 아닌 다른 체제로 전환하는 것까지 용인하겠다는 것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고르바초프는 진정한 실권자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처럼 무력하게 날개가 꺾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고르바초프는 1990년 1월 1일자 《타임》지에 1980년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뽑혔다. 그러나 이때부터가 내리막길이었다. 1990년 봄 고르바초프는 더욱 곤궁에 빠졌다. 소련공산당의 독점적 지위를 폐지하기 위해 인민대표 대의원들을 움직여 복수 정당을 허용하는 법을 통과시켰는데, 이로 인해 기득권층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그 무렵 리투아니아 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제국의 해체가 시작되었다.

 

1990년 7월 16일 그는 헬무트 콜 수상을 만나 독일 통일의 길을 열어 주었고, 10월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소련 군부는 서기장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뻐하지 않았다. 서방 세계가 미국과의 군비 경쟁에서 진 패배자에게 내린 선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이건은 승리자였고, 고르바초프는 패배자였다. 레이건은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무장 해제시킬 수밖에 없도록 몰아갔고, 결국 그 작전은 멋들어지게 맞아 들어갔다. 1991년에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우선 소련 인민대표회의는 헌법에 명시된 공산당 일당독재를 폐지하고 고르바초프를 소련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와 함께 소련 정부는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공식 승인하였다. 서방의 나토에 대항해서 결성된 공산권의 바르샤바 조약기구도 해체되었다. 8월 19일 이런 일련의 사태를 더 이상 보다 못한 보수 강경 세력이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결국 서기장직을 사임하면서 공산당의 해체를 권고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최소한 소비에트연방만큼은 존속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주도권은 이미 그의 손을 떠나 있었다. 15개의 소비에트공화국들 가운데 11개국이 옐친과 독립국가연합(CIS)을 지지하고 나서자, 보리스 옐친은 12월 12일 러시아공화국을 독립국가로 선포하였다.

 

미국에 패배한 이 제국은 권력욕에 불타는 옐친의 손에 산산이 나누어져 마침내 개혁가 고르바초프의 시대에 문을 닫게 되었다. 1918년부터 줄곧 크렘린 궁에 펄럭이던 붉은 깃발이 1991년 12월 31일에 영원히 내려졌다.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직접 발탁한 인물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당의 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그전까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던 옐친을 모스크바 시당위원회 1서기로 전격 승진시켰다. 옐친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것을 결정적인 반전의 기회로 삼기도 했다. 공식석상에서 고르바초프를 웃음거리로 만들었으며, 쿠데타를 계기로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를 적극 밀어붙였다.

 

아마 소비에트연방은 고르바초프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붕괴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고르바초프라는 사람이 있었기에 소련 주민들을 포함해서 전 세계인들이 끔찍한 유혈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그가 훗날 자책했던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공산당의 개혁성을 철석같이 믿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공산당의 체질부터 철저히 바꾸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레닌을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주저 없이 꼽았다. 자신의 저서에서도 줄곧 10월 혁명과 사회주의의 업적을 찬양하였다. 어쨌든 그의 현재 모습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지라도 그가 20세기를 움직인 인물이고, 수많은 사람들을 압제와 굴레에서 해방시킨 사람이라는 사실은 잊어서는 안 된다. 인류가 필요로 하는 패배자들은 저마다 특성이 있는 것이다.

 

왕조에서 쫓겨난 패배자들

빌헬름 2세 ― 어떤 패배자도 그처럼 무기력하게 무너지지는 않았

독일의 황제이자 프로이센의 왕이었던 빌헬름 프리드리히 빅토르 알베르트 폰 호엔촐른(1859~1941)은 타고난 승리자처럼 보였다. 스물아홉 살이던 1888년에 한 나라가 그의 품에 떨어졌다. 20년 내에 지상에서 가장 강대한 두 세 나라 가운데 하나로 비상할 독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물려받은 것은 단순히 돈이 아니라 융성하는 세계제국이었다. 이것은 그에게나 제국에는 숙명이자 재앙이었다. 빌헬름은 충동적이고, 끈기가 없고, 생각과 일에서 무절제하고, 그저 다방면으로 관심만 많고, 신하들을 선택하는 것도 서툴고, 측근의 귀엣말에 쉽게 혹하고, 교만함을 숨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또한 입담이 좋은 건 사실이지만, 때를 가리지 않고 말을 많이 하고 싶어 해서 탈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기고만장하고 거침없는 연설이 글로 인쇄되는 순간 외교적 재앙이 되었다.

 

1900년에는 중국 의화단을 토벌하기 위해 원정대를 떠나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조금도 인정사정 봐줄 것 없다. 예전에 훈족이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극동에서도 똑같은 모습을 보여 주길 바란다.” 참모들은 깜짝 놀라 황제의 연설 중에서 훈족에 대한 부분은 빼 달라고 전신국에 압력을 행사했다. 유럽 곳곳에서 독일 황제의 막말과 호전적인 언사를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비아냥거림은 점차 불안으로 바뀌어 갔다. 빌헬름의 호전적인 언사가 실제로 전쟁으로 나타난 것이다. 1914년 영국의 전쟁홍보국은 1900년에 행한 그 막말을 다시 끄집어내 벨기에를 침공한 독일 병사들을 피도 눈물도 없는 잔학한 훈족으로 묘사하였다. 처칠에 따르면 빌헬름의 이러한 쾌도난마식의 단호한 어법이 영국인들에게 ‘독일의 위험’을 주입시켰다. 실제로 빌헬름이 20세기 첫 재앙인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관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그의 오만불손한 언행일 것이다.

 

빌헬름 2세는 독일의 최고사령관이자, 제국총리를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는 막강한 황제로서 승리에 눈먼 장군들을 제어하거나, 아니면 이 참혹한 전쟁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일찍 종결시킬 힘은 갖고 있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독일의 피해를 줄이고 수백만 병사들의 목숨을 살리는 방책이자, 자신의 자리까지도 지킬 수 있는 묘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빌헬름에게는 목표 의식과 에너지가 부했다. 특히 전쟁 후반기에 독일의 실질적인 주인 노릇을 하던 장성들, 즉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과감하게 내쳤어야 했는데, 그러한 단호함이 모자랐다. 1918년 9월 29일 독일의 실권자였던 두 장군이 황제에게 전쟁 패배를 보고한 뒤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권고하였다. 현실을 직시하고 훗날을 기약하는 혜안이 있었더라면 책임을 통감하는 뜻으로 퇴위를 선언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아들이나 손자에게는 왕위가 돌아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퇴위를 요구하는 정치인들의 압력을 피하기 위해 10월 29일 베를린과 영원히 작별을 고한 뒤 자신의 장원이 있는 벨기에의 스파로 떠났다.

빌헬름은 스파에서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나는 수백 명의 유대인과 수천 명의 노동자들 때문에 왕위를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1918년 11월 4일 폭동을 일으킨 수병들이 킬의 시청을 점거했다. 11월 7일에는 새로운 총리대신으로 임명된 막스 폰 바덴 왕자가 황제에게 정식으로 퇴위를 권고했다.

 

11월 9일 11시 30분 막스 폰 바덴 제국총리가 베를린에서 독단적으사임 의사를 밝히며 황제와 황태자도 곧 퇴위할 것이라고 공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빌헬름은 절규했다. “이건 반역이야!” 그러자 힌덴부르크까지 직설적인 표현으로 황제를 몰아붙였다. “폭도들이 폐하를 베를린으로 끌고 가 혁명정부에 포로로 넘긴다 하더라도 소신의 책임이 아닙니다. 폐하께 마지막 간언을 드리건대 부디 퇴위하시고 네덜란드로 피신하시기 바랍니다.” 빌헬름은 어찌 선장이 침몰하는 배를 두고 떠날 수 있느냐는 말로 항변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마지막 항변이었다.

 

1920년 승전국들이 네덜란드 정부에 빌헬름을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국제적 도덕을 어긴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었다. 헤이그 정부는 거하였다. 대신 모든 정치활동을 금하겠다는 빌헬름의 약속을 받아냈다. 실제로 그는 이 약속을 지켰다. 이제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기존의 네 강대국이 무너졌다. 오스만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었고, 러시아와 독일은 내부적으로 뒤집어졌다. 독일공화국은 빌헬름의 막대한 재산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예전의 독일 황제는 해자(垓子)와 29개의 방이 딸린 성을 구입할 수 있었다. 성 이름은 도른 하우스였다. 빌헬름은 독일에 있는 자신의 옛 성에서 가구와 책, 제복, 그리고 값나가는 예술품들을 58대의 화물차에 실어 이 도른 하우스로 날라 오게 했다. 50명에 이르는 시종들이 묵을 숙소로 건물을 한 동 더 짓기도 했다. 빌헬름은 이 도른 하우스에서 21년을 더 살았다. 도른 하우스는 1948년 이후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독일의 마지막 황제는 세계사의 위대한 패배자들 가운데에서 두 가지 기록을 세웠다. 첫째, 한창 강대국으로 융성하던 제국을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잃어버린 지도자는 없었다. 러시아의 차르와 고르바초프도 제국을 잃었지만, 그들이 잃은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휘청거리고 있던 제국이었다. 둘째, 패배한 뒤에도 반감과 물질적 걱정, 절망과 부끄러움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살았던 사람은 없었다. 물론 패배에 따르는 일말의 씁쓸함이야 어쩔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모든 게 잘못이었을까?” 빌헬름이 1935년에 직접 써서 자신의 전기 작가에게 넘긴 메모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물음을 통해 빌헬름은 부분적으론 잘못일 수 있지만, 절대 전부가 잘못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강력히 암시하고자 했던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그는 통찰력이 부족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몰린 패배자들

 

렌츠 ― 괴테에게 발길질당한 천재 작가, 미워하기에는 너무 재능이 뛰어난 사람

세상에는 처음부터 패배자의 운명을 안고 태어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더구나 그런 사람이 뛰어난 재능이라도 타고났다면 비극적인 길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사람들 중 하나가 야콥 미하엘 라인홀트 렌츠(Jakob Michael Reinhold Lenz, 1751~1792)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설상가상으로 괴테와 경쟁까지 벌였다. 두 사람은 1771년 초 스트라스부르에서 처음 만난 뒤로 차츰 우정을 키워 나갔다. 그런데 바로 이 우정이 훗날 괴테에게는 분노로, 렌츠에게는 불운으로 변했다. 두 사람은 전통적 교육을 받았고, 시를 썼으며, 연극을 완전히 뜯어고치려는 대담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점만 빼면 둘은 상당히 달랐다. 당시 스물두 살이던 괴테는 유복한 부모 밑에서 아무 걱정 없이 자란 풍채 좋은 법학석사였고, 그보다 1년 6개월 어린 렌츠는 신학 공부를 중단한 뒤 가정교사로 근근히 살아가는 산만하고 왜소한 청년이었다. 헤센지방 출신의 괴테는 상당수다스러웠던 반면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오늘날 라트비아에 해당하는 곳에서 성장한 렌츠는 발트 지역의 억양으로 천천히 말을 하는 유형이었다. 그밖에 두 사람의 마지막 안식처도 극단적으로 갈렸다. 괴테는 기품 있는 바이마르 영주 묘지에 묻혔지만, 렌츠는 모스크바의 빈민굴에서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괴테가 1771년 8월 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했을 때 렌츠는 제젠하임의 아름다운 목사 딸 프리데리케 브리온을 연모했는데, 렌츠가 프리데리케에게 서신으로 이별을 고하기 전에 괴테가 먼저 열렬히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괴테로서는 렌츠가 자신에 앞서 프리데리케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평생 불쾌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보인다. 괴테는 나중에 제젠하임을 방문했을 때 프리데리케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다. 괴테가 연애편지를 보내는 바람에 괜히 자기가 렌츠에게 양다리나 걸치는 몹쓸 사람으로 취급받았다는 것이다. 괴테는 렌츠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늘 자기 방식대로 사랑했고, 프리데리케가 그런 그를 알아주지 않자 유치하게도 자살 소동까지 벌였다. 게다가 이런 소동의 배경에는 나에게 피해를 주고, 주위의 동정을 끌어 나를 파멸코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괴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참으로 이상할 정도의 거친 반응이었다. 괴테가 한동안 렌츠를 위험한 경쟁자로 생각했다는 것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괴테는 1773년에 희곡 『괴츠 폰 베를리힝겐Gotz von Berlicbingen』으로 명성을 얻었다. 렌츠는 이듬해에 『연극에 관한 주석Anmerkungen ubers Theater』을 발표했다. 그는 이 책에서 프랑스 드라마의 경직된 규칙들을 포기하고, ‘사건이 마치 천둥소리처럼 잇달아 전개되는’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을 실현한 작품이 바로 괴테의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었다. 그런데 렌츠는 1771년에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책의 내용을 낭독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것은 괴테에게 영감을 준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이었다. 괴테는 당연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 불쾌감이 얼마나 컸던지 수십 년이 지난 1813년 『시와 진실Dicbtung und Wabrbeit』에서도 렌츠 때문에 야기된 일종의 ‘정신적 저작권’ 시비를 거론하며 렌츠를 강한 어조로 비난하였다. 이것은 이미 오래전에 패배자로 낙인찍히고, 러시아에서 행방불명까지 된 사람에 대한 지나친 공박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괴테는 1774년에도 렌츠로 인해 불쾌한 일을 겼었다. 렌츠는 괴테의 주선으로 간신히 자신의 희비극 『가정교사Hofmeister』를 출간할 출판사를 찾았다. 그런데 렌츠는 별난 성격 그대로 이 작품을 익명으로 발표했다(사실 렌츠의 유별난 행동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발표된 희곡들도 가명으로 발표했을 뿐 아니라 평생 동안 자신의 시를 한자리에 모아 볼 생각조차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가정교사』에서 나타난 활기찬 언어와 급격한 사건 전개를 보면서 괴테가 썼다고 느낄 정도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1776년 초 렌츠는 무일푼으로 스트라스부르를 등졌다. 그리고 그는 바이마르에 모습을 나타냈다. 괴테가 지난해 11월부터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의 초청으로 머무르던 곳이었다. 같은 해 6월, 아직 스물일곱도 되지 않은 괴테가 시종관의 자리도 거치지 않고 공작의 외교참사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감성과 열정으로만 넘치던 ‘질풍노도운동(Sturm und Drang : 합리주의 계몽 숭배에서 벗어나 자연, 감정, 개인주의를 고양하는 문예운동으로 18세기 말 독일에서 일어났다)’ 시기에 자신의 모습을 아는 사람과 바이마르 궁정에 함께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게다가 렌츠는 ‘미련한 짓(괴테의 표현이다)‘을 저질러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불렀다. 이 미련한 짓이 어떤 일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궁정 사람들을 조롱하는 시를 쓴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괴테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렌츠를 24시간 안에 여기서 떠나게 하라는 공작의 명령을 받아냈다. 한편으로는 괴테의 심정이 이해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척 비정하고 매몰찬 행동으로 느껴진다. 현실 논리에 어둡고 현실을 타개할 재주도 없는 옛 친구를 이런 식으로 내팽개치는 행동은 자칫 파멸의 구렁텅이로 내모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괴테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승리자가 패배자에게 발길질까지 한 셈이다.

 

‘나는 형상화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과 ‘내 작품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태도, 이 두 가지만으로도 렌츠가 괴테처럼 높은 명성을 누릴 수 없었던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런 예정된 실패 위에 괴테의 그림자가 3겹으로 짙게 드리워지는 바람에 렌츠가 겪은 좌절은 더 한층 가속화되었다. 물론 이것은 괴테를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는 두 가지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우선 괴테는 다른 위대한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과 동등한 자리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을 참지 못하는 성향이었다. 괴테는 렌츠에 대해서는 단순히 깎아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악의에 찬 비방까지 서슴지 않았다.

 

1776년 바이마르에서 쫓겨난 렌츠는 스위스에서 힘들게 살아갔고, 때로는 스스로 통제력을 상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괴테가 외교참사관에서 추밀고문관으로 승진한 1779년 여름 예나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렌츠의 동생 카를이 형을 리가의 고향집으로 데려갔다. 리보니아의 관구총감독이 된 아버지는 아들의 병을 남에게 털어놓기도 부끄러운 병으로 생각했고, 아들의 문학작품도 정신병적 탈선으로 여겼다. 그런데 다행히 고향집에서 건강을 회복한 렌츠는 1781년에 모스크바로 떠났고, 거기서 한 문학회에 가입해 셰익스피어 작품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였다. 그러던 1792년 5월 렌츠는 일정한 거처도 없이 거리를 방황하다가 빈민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향년 마흔한 살이었다. 렌츠의 문학이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데에는 괴테의 『시와 진실』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문화 권력의 핵심에 있던 괴테의 말 한마디는 곧 진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1828년 3권짜리 렌츠 전집이 발간되었다. 렌츠가 쓴 글 중에 이런 시구가 있다. “파괴하는 삶이여, 너울너울 날아라!”

 

세계적인 명성을 도둑질당한 패배자들

 

앨런 튜링 ― 영국의 승리를 도운 무명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조지 스미스 패턴과 버나드 몽고메리의 연합군보다 영국이 승리하는 데 더 크게 기여한 인물이 있었다.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 1912~1954)이 그 주인공이다. 그런이 사실은 그가 영국 법정과 정부의 수모에 못 이겨 자살한 지 20년 만인 1974년까지 묻혀 있었다. 당시 영국 정부의 수반은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윈스턴 처칠이었다. 처칠은 이 수학적 천재가 영국의 승리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텐데도 자신의 전쟁 회고담에서 튜링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측은 1986년 판에서야 기나긴 고심 끝에 진실에 근접하는 결단을 내렸다. 런던에서 태어난 앨런 튜링은 짧은 삶 동안 외곬의 괴짜로 통했다. 학창시절에는 너저분한 외모에 말도 더듬거리고, 영어와 라틴어를 몹시 싫어하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평생을 맞춤법과 글쓰기 때문에 고생을 했다. 이런 그도 수학에서만큼은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어쨌든 이런 외곬의 괴짜가 15년 뒤 독일 해군의 암호를 풀어 영국의 숨통을 죄던 독일 잠수함을 마비시켜 조국을 구해 내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튜링은 영국이 전쟁에 돌입한 지 하루 만인 1939년 9월 4일에 런던 북쪽의 블레츨리 파크에 위치한 ‘정부암호학교’에 파견을 나가 암호해독반의 수학팀장에 임명되었다. 이 학교를 운영하던 영국 첩보부평소에 튜링을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튜링이 1938년에 「계산 가능한 수에 관한 연구」에서 제기한 아이디어를 아직 제작된 적이 없는 컴퓨터의 완벽한 수학적 모델로 확장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당대 사람들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이 가상의 기계를 “튜링 기계”라고 불렀다. 독일 암호기인 에니그마(Enigma)는 난해하기 짝이 없어서 특별한 해독 능력을 갖춘 전문가가 시급한 실정이었다. 그리스어로 ‘수수께끼’라는 뜻의 에니그마는 그야말로 상대방에겐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였다. 에니그마는 타자기처럼 사용하는 암호기였다. 하지만 타자기 안에 미리 설치해 둔 회전체(Rotor) 덕분에 입력한 철자 대신 다른 철자가 타이핑되어 나오는 방식이었다. 초창기에는 회전체가 세 개였지만 나중에는 여덟 개로 불어났다. 이러한 다중 회전체 시스템으로 타이핑한 결과는 경우의 수가 백만 가지를 넘었다. 게다가 회전체의 위치도 날마다 바뀌었기 때문에 24시간 안에 암호문을 해독해 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1940년 튜링이 처음 고안한 기계들을 블레츨리 파크에 설치하였는데, 군인들과 수학자들은 이것을 “폭탄”이라 불렀다.

 

폭탄 하나는 전기로 연결된 12개의 원통형 연산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24시간 가동되면서 포착된 독일 무전들 가운데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철자들을 걸러내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런데 영국 정부가 경제 여건상 더 이상 폭탄 제조 경비를 지원해 주지 못하자 튜링은 처칠 수상에게 격렬한 항의성 편지를 썼고, 결국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하루 속히 결과를 내놓으라는 블레츨리 파크의 수학자들에 대한 영국 정부의 압력은 1943년 3월 1일에서 20일 사이에 최고조로 달했다. 그만큼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3월 21일 급격한 전세 변화가 일어났다. 처칠과 전쟁사가들은 그 원인을 정교해진 레이더 시스템, 개선된 어뢰, 미 장거리 폭탄의 증강, 그리고 새로운 호송 전술의 구축으로 돌렸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전세가 급격하게 전환된 데에는 튜링의 암호해독반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렇게 해서 영국 함대사령부는 독일 잠수함들의 위치와 공격 계획을 손바닥 보듯이 훤히 꿰차고 있었다.

근데 왜 오늘날까지도 대서양에서 벌인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하는 결정적 기여를 한 블레츨리 파크 팀의 이야기가 관련 서적들에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영국 정부가 자신들의 비밀 작전 중에서도 가장 은밀했던 작전을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고스란히 묻어 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팀에서 천재적인 두뇌 역할했던 튜링의 비참한 죽음도 어느 정도 작용을 했는지 모른다. 전쟁이 끝나자 튜링과 그의 동료들은 블레츨리 파크의 암호학교를 나서기 전에 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한마디도 누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야 했다. 어쨌든 튜링은 1946년에 대영제국 공로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서훈 사유는 비밀에 붙여졌다.

 

튜링은 1948년까지 국립물리학연구소에서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 팀장으로 일했다. 194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세계 최초로 1만 8천 개의 전자진공관을 갖춘 대 컴퓨터 에니악(ENIAC, 전자식 수치적분 계산기)이 만들어졌다. 이 소문을 들은 튜링은 에니악의 연산 속도를 훨씬 능가하는 ‘파일럿 모델(Pilot Model)'을 만들어 냈다. 1948년 튜링은 맨체스터 대학의 컴퓨터연구소 부소장에 임명되었다. 이제 그의 관심은 점점 인공지능에 집중되었다. 1950년 튜링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하나의 실험을 제안했다. 오늘날에도 전문가 그룹에서는 ’튜링 테스트‘로 유명한 실험인데, 그 내용은 이렇다. 서로 보이지 않는 방 세 개에 인간 두 명과 컴퓨터 한 대를 넣어 둔다. 텔렉스로 다른 두 방에 질문을 보낸다.

 

그러면 같은 방식으로 답변이 돌아온다. 이때 컴퓨터를 인간으로 간주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이것은 “사고하는 컴퓨터”라 부를 만하다는 것이다. 튜링은 작업 처리 속도와 저장 능력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어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프로그램을 바꿀 수 있는 컴퓨터가 나오리라 예언했다. 언젠가 '튜링 테스트'에서 인간이 웃음거리가 될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1951년에는 튜링은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왕립학회(Royal Society) 회원이 되었다.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보상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급격한 추락이 시작되었다. 동성애자였던 튜링은 열아홉 살 청년을 우연히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 청년이 범죄 집단과 어울린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주말에 이 청년을 혼자 둔 채 외출을 하고 돌아와 보니 집 안이 온통 다 털려 버렸다. 그는 즉시 경찰을 불렀다. 어쨌든 그는 부자연스러운 성문란 혐의로 고소당했고, 이어 영국 정부는 튜링을 컴퓨터연구소 부소장직에서 해임시켰다. 1954년 6월 7일 튜링은 마흔둘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사람에게도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어디서도 그의 죽음을 설명해 줄 만한 문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어떤 매체에도 추모사 하나 실리지 않은 외로운 죽음이었다.

 

1974년 블레츨리 파크의 암호해독 작전에 군 정보요원으로 동참했던 프레더릭 윌리엄 윈터보섬이 『울트라의 비밀The Ultra Secret』(‘울트라’는 암호해독 작전명이었다)이라는 책을 냈다. 영국 당국으로부터 에니그마 해독에 얽힌 이야기를 써도 좋다는 허락을 간신히 받아낸 끝에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이로써 블레츨리 파크의 생존자들은 29년 만에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튜링이 죽은 지 20년 뒤였다. 1997년 슈퍼컴퓨터 딥블루(Deep Blue)가 체스 세계챔피언을 꺾었다. 2002년에는 유명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박사가 이런 경고를 던졌다. “이젠 정말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상이 올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 그렇게 되면 모든 인간은 패배자가 될 것이다.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인생들

 

윈스턴 처칠과 덩샤오핑 ― 누구도 이길 수 없었던 두 사람

 

유명한 패배자들은 단 한 번의 패배로 영원히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왕좌에서 쫓겨난 왕들, 좌절한 작가들, 그리고 모진 운명의 장난에 놀아난 천재들이 그랬다. 그런데 한 번 쓰러진 후에 다시 기회를 잡고 일어난 사람들도 있다. 정치인들 중에 특히 그런 사람이 많고, 장군과 운동선수들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덩샤오핑처럼 세 번이나 재기에 성공하고, 윈스턴 처칠처럼 네 번이나 다시 벌떡 일어났다면 그들을 가리켜 ‘오뚝이 인생’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레닌과 마찬가지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은 예수회 학교를 다녔고,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다. 1921열일곱 나이에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1931년부터 마오쩌둥(毛澤東)의 동지가 되었으며, 1945년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 1955년에는 정치국원에 임명되었다. 이런 사람이 마오가 1966년에 일으킨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에 의해 반마오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쫓겨났고, 나중에는 사상개조 교육까지 받아야 했다. 패배한 사람이 복수심과 절망의 감옥에만 갇혀 있으면 그것은 영원한 패배로 이어진다. 덩샤오핑은 그리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이빨을 갈았을지 모르나 겉으로는 온갖 수모를 다 받아들였다. 심지어 마오가 강력히 추진하던 집단화 정책에 반발했던 자신의 행적과 개량주의를 공개석상에서 자아 비판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7년 뒤에 부수상으로 당당하게 복귀하자 서방 세계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1975년에는 당 부주석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1976년 4월 마오는 죽음을 반년 남겨 놓은 상태에서 덩샤오핑의 모든 관직을 박탈해 버렸다. 이것이 두 번째 실각이었다. 이것은 마오의 아내 장칭(江靑)이 꾸민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의 아내는 남편이 죽은 뒤 이른바 4인방(四人幇 : 마오쩌둥이 주도했던 문화대혁명 기간 중 가혹한 정책을 수행했다는 죄목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급진적인 정치 엘리트들의 핵심집단이다) 세력과 함께 자신이 직접 권력을 잡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곧이어 4인방이 체포되자 덩샤오핑은 1977년에 일흔셋 나이로 다시 중국공산당과 정부 요직에 복귀하였다. 이것이 세 번째 재기였다. 1979년 덩샤오핑은 미국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고, 미국은 화해의 손짓으로 대만을 버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유일하고 합법적인 중국으로 인정하였다. 153센티미터의 작고 늙은 노인, 청색의 인민복을 입은 공산주의자, 권력자의 이미지가 자연스레 뿜어져 나오는 덩샤오핑은 곧 인기스타가 되었다.

 

1980년 덩샤오핑이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주목을 받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가 권력에서 밀려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1983년 그는 일흔아홉 나이로 국가군사위원회 주석에 임명되었고, 1985년에는 당젊은 피를 수혈하면서 대대적인 쇄신을 추진하였다. 또한 중국 경제의 현대화를 지상 과제로 삼고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이런 점 때문에 그는 《타임》이 뽑은 올해의 인물에 두 차례나 선정되었다. 그러나 1989년 6월 덩샤오핑은 천안문 광장의 시위대에 무력 진압 명령을 내려 1,000명이 넘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1989년 11월 그는 장쩌민에게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물려준 뒤 정계에서 공식 은퇴하였다. 그러나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있으면서도 그의 막후 영향력은 대단했다. 예를 들어 1992년에는 정치국 내에서 경제개혁파가 승리하도록 손을 쓴 사람이 덩샤오핑이었다.

오뚝이 인간들은 결코 편안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아니라 모두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매번 다시 일어설 수 있겠는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은 네 번 패배한 뒤에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 네 번이나 승리를 쟁취한 인물이다. 서른한 살에 자유당 내각에서 식민차관(植民次官)으로 관직을 시작해서 서른다섯에 벌써 내무장관이 되었고, 1911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주목을 많이 받는 자리 중 하나인 영국의 해군장관직에 올랐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함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이 된 것이다. 1915년 처칠은 독일과 동맹을 맺은 오스만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을 영국 함대로 침공했다. 그러나 두 달 뒤 처칠은 작전 실패를 공식 시인하였다. 그리고 1915년 5월 17일 해군장관에서 해임되었다. 이것은 네 번의 실각 가운데 처음인 동시에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유일한 패배였다.

 

그런데 1900년까지 군인으로 근무한 처칠로서는 세계대전이 이렇게 자신과 무관하게 전개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기에 소령 계급으로 자원입대해서 프랑스 전선으로 나갔다. 그러나 혁혁한 전과를 올릴 기회가 없었을 뿐 아니라 전직 해군장관이 일선 참호에 파견된 것이상하게 바라보는 병사들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19165월에 평의원 신분으로 의회로 돌아갔다. 그것은 빗나간 결정이 아었다. 1917년 7월, 반년 전에 수상이 된 로이드 조지는 땅딸막하면서도 정력이 넘치고, 최근에는 까다롭게 굴지 않는 처칠을 기억해 내고 그를 군수장관에 임명했다. 처칠은 열정을 모두 쏟아 부어 자신이 1914년에 묻어 두어야 했던 프로젝트를 다시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바다의 전함처럼 육상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닐 수 있는 ‘육상용 선박’을 제작하는 프로젝트였다. 신무기 생산을 기밀에 붙이기 위해 신무기에 ‘탱크’라는 위장용 이름을 붙였다. 이렇게 해서 1917년 11월 프랑스 캉브레에 탱크 324대를 투입하여 독일군 전선을 누볐다. 영국 지도부는 예상치 못한 성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자 처칠은 군수부에서 이름을 바꾼 전쟁부 장관으로 있다가 1922년에 로이드 조지가 실각하자 같이 물러났다. 이후 패배가 이어졌다. 3년 사이에 세 번이나 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1924년 느닷없이 처칠이 다시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처칠은 재정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을 뿐 아니라 보수당 내에서는 여전히 배신자로 낙인 찍혀 있는 사람이었다. 1904년에 처칠이 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보수당 당수였던 스탠리 볼드윈 수상이 그를 재무장관으로 중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우파의 지도자로서 독설로 유명한 처칠을 의회 내의 반대파로 놓아두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각으로 끌어들여 우군으로 삼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1929년 볼드윈이 실각하자 처칠도 함께 물러났다. 이후 처칠은 조명 받지 못한 초라한 정치인 신분으로 10년 세월을 보낸다. 아니, 오히려 성가신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우선 영국 정부가 인도의 간디를 용인한 것을 대영제국을 팔아넘기는 행위라고 격렬히 비난하였다. 그러나 1933년부터는 통한의 심정으로 히틀러의 위험을 경고했다.

 

1937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감행하자 윈스턴 처칠은 하루아침에 잡소리나 해대는 귀찮은 늙은이에서 혜안을 지닌 예언자로 급부상했다. 9월 3일 마침내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5월 정권을 이어받은 네빌 체임벌린 수상은 예순넷의 처칠을 해군장관에 임명하였다. “윈니(윈스턴 처칠의 애명)가 돌아왔다!” 영국 해병들이 외쳤다. 24년 만에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1940년 5월 10일 마침내 처칠에게 생애 최고의 순간이 찾아왔다. 히틀러가 네덜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연이어 벨기에와 프랑스까지 진격하자 체임벌린은 사퇴했고, 그 뒤를 이어 처칠이 수상에 선출되었다. 처칠은 고군분투하며 1945년까지 반(反)히틀러동맹의 선두에 서서 전쟁을 이끌었다.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직후 독일의 운명을 결정하려고 승전국 정상들이 포츠담에 모였다. 회담 중간인 1945년 7월 25일에 실시된 영국 총선거에서 영국인들은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 대신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을 선택한 것이다.

 

영국인들은 전쟁 지도자로서는 처칠을 환호했지만, 내정 면에서는 보수적인 처칠보다 개혁적인 노동당을 더 선호했다. 세계는 영국인들의 어처구니없는 선택에 아연실색했다.

이런 와중에도 처칠은 미국이 소련의 권력 확대와 팽창욕을 너무 등한시하고 있는 것을 걱정했다(처칠은 공개석상에서는 ‘철의 장막’이라는 용어를 1946년에 처음 사용하였는데, 그 뒤 세계적으로 유명용어가 되었다). 처칠은 1949년에 생애 두 번째로 《타임》이 선정올해의 인물로 뽑혔고, 1953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노벨문상을 받았다. 그는 여전히 왕성한 활동과 권력을 원했다. 1951년 10그는 일흔여섯 나이로 다시 한 번 수상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거둔 마지막 승리였다. 1953년 6월 정부의 공식 문서에 따르면 처칠은 한 달간 ‘수상으로서 해야 할 모든 의무에서 면제된 것’으로 나와 있다.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치료를 받았던 것이다. 19554월 6일 오래전부터 동지들의 사임 권유가 있었음에도 모르쇠로 일관하던 처칠이 결국 수상직을 사퇴하였다.

죽음은 그의 나이 아흔에 찾아왔다. “정말 너무 지루했어.”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고 한다. 궁극적인 패배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생물학적인 쇠약함과 죽음이었다. 이것은 우리 모두 겪는 일이기는 하지만, 종종 운명에 저항했던 처칠로서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그런 운명을 더 견디기 힘들어했을지 모른다.

 

나가는 말

안티히어로(Antihero)를 위한 예찬

우리는 승리자들을 경탄하면서도 미워한다. 간혹 끌리는 승리자들이 있긴 해도 정을 느끼지는 못한다. 오히려 우리가 연민을 느끼고 공하는 이들은 실패하거나 승리를 사기당한 사람들이다. 또한 마치 추하기 위해 정상에 올랐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상을 밟자마자 다내려와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낀다. 세상사를 가만히 지켜보면 집요하고 끈질긴 사람일수록, 혹독하고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사람일수록 정상에 좀더 쉽게 도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유명해지고자 하는 야심이 없는 사람들은 대개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편하고 유쾌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어떤 운명의 시련이 닥쳐도 밝은 표정으로 감내하는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성욥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패배와 곤궁과 고통은 신으로부터 버받은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랑의 표시”였다. 우리가 비운의 영웅들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는 것도 어쩌면 이런 논리의 영향일지 모른다.

 

출처 : 도형분석상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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