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한 때 예수님의 제자를 핍박하던 자였으나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후예수님을 강력히 증거하였고, 전도여행을 통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는 로마시민이자 율법학자로 복음을 체계화 해 여러 서신서를 통해 우리에게 남겨준 학자적 사도입니다. 이 글은 이배식 목사님의 '바울 신학'에 있는 내용입니다.
< 바울 신학 >
Ⅰ. 서 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예수의 제자들은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 기적과 이적을 행하며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믿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단시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도를 쫒는 사람들에게 대한 핍박은 날로 더욱 심화되어 갔다.
하지만, 성령이 충만한 예수의 제자들은 굴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의 복음 전도의 범위는 이방 지역에 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당시 사울은 헬라문화권에서 성장한 유대인(디아스포라)으로서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으며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예수의 도를 좇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여 조상의 유전인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켰던 자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강권적인 역사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처하던 율법주이자 사울을 택하여 복음으로 새롭게 거듭난 사람 복음의 사도 바울되게 하시고 이방 지역에 복음을 증거할 사도로 택하셨다. 다시 말해서 율법주의자 사울이 복음의 사도 바울이 된 경위는 주님의 일방적인 강권 역사로 시작되었다.
조상들의 유전인 율법을 열심히 믿고 지켰던 사울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자처하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이단시 하였으며,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의 도를 좇는 자들은 남여불문하고 투옥하기 위하여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대제사장에게 청하여 가지고, 예수의 도를 좇는자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홀연히 빛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며, 또한 그의 음성을 듣고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되었고, 더욱이 아나니아라 하는 예수의 제자에게 안수를 받고 그를 통하여 예수님이 분부하신 말씀을 들을 때 멀었던 눈이 다시 보게 되었으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율법주의자 사울이 복음의
사도 바울로 변하여 주님께서 주신 사명 이방의 사도로서 복음선교에 전 생애를 바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변한 사도 바울의 회심의 동기와 소명 그리고 그의 신앙과 사상을 신학적 차원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Ⅱ. 사울이 바울된 신학적 배경과 소명
사울은 예수와 같은 시대(로마제국 통치하)에 살았으며, 종교적으로는 엄한 율법아래에서 교육받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나님을 공경한 철두철미한 율법사상의 소유자였으며, 사회적으로는 헬라문화권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성장하여 어려서부터 이방문명 속에서 보고 배워 이방 문화에 박식하였으며, 특히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울은 두세계의 사람 즉, 유대인세계와 헬라인세계의 사람이었다. 그는 내적으로는 철저한 유대적인 기질을 가졌으며, 그뿐 아니라 사울은 유대인들이 거의 알지 못했던 로마와 헬라를 잘 알고 있었다.
사울이야말로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앞에 복음을 전하기에 최적합한 자로 인정 택함받아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 유대종교와 예수 그리스도
A. 유대종교와 사울
유대인들의 종교관은 여호와만이 유일한 신으로 믿어왔다. 만물을 창조하신 분도 여호와이시며, 다스리는 분도, 명령하시는 분도, 심판하시는 분도, 구원하시는 분도, 여호와 한 분으로 믿어 왔으며 특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수많은 민족중에서 그의 후손을 택하시고,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다(신 4:20, 10:14-15)고 믿어왔다.
이스라엘 백성의 특권은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신 6:14-15) 하나님의 뜻을 체험하고, 그 뜻을 이루어 나가는 백성으로선택되었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주신 율법(게명)이 이스라엘 역사상 항상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에 언약이며, 축복의 약속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때 이 백성을 축복하였으며 불순종할 때 벌을 내렸다.(신 11:26-28)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관은 제물인 소나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드림으로 죄사함 받으며 깨끗해 지는 줄만 알아왔다. 고로 항상 외적인 의식에만 치중하여 왔다. 이러한 율법적인 신앙관에 굳어버린 그들이지만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함으로 산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종말론에 기대가 눈에 보이는 현실과 육신적인 면에만 치우치다보니, 그들의 미래에 대한 소망관도 항상 세상적인 눈에 보이는 희망에 치중하였다. 즉, 메시야의 오심과 잃어버린 국토의 회복, 그리고 모든 이종교자들의 침해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 줄 것과 이미 예정하신 다윗의 혈통에 주어진 약속이 속히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메시야 바로 구세주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고,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다. 그들은 오리라 한 메시야는 영광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 권세자들을 심판하고 통치할 줄만 알아 왔다. 율법주의적 종교관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에게는 목수의 아들인 예수가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야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예수는 죽을 것을 말하며, 또한 많은 이적과 표적을 행하였으나 로마 식민지 노예에서의 해방에 대한 주권 회복의 말은 없고, 도리어 유대인인 율법주의자들의 신앙의 모순된 점을 지적 개혁을 주장함으로 하나님의 유일한 택한 백성으로 자부하던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성경에서 마지막 율법의 예언자인 세례 요한도(마 11:13) 오실 메시야가 바로 예수임을 예언하고(마 3:11-17,요 1:33-34) 세례까지 베풀고도 믿어지지 않아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에게 확인하였다.(마 11:3) 율법안에서 택한 백성임을 자부하는 유대인들은 택함받은 유대인외에 다른 민족은 버림받는 자들로만 알아왔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순종치 않는 백성이 바로 유대인들이었다.(마 23:14, 롬 10:3)
예수님께서는 이 그릇된 신앙을 복음으로 개혁하시었다. 유대인들은 이 복음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유대교 종교가정에서 자라난 사울 역시 혈통으로는 유대인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철저한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 라고 자부하였으며,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열심있는자로 예수의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여를 결박하여 옥에 넘기기까지 하였다.
예수에 대하여 유년시절 과정을 기록한 문헌은 별로 없다. 이교적인 멸시를 받고 있었던 갈릴리의 나사렛이 그의 고향이고, 그의 부친 요셉은 목수였으며, 그의 모친은 마리아이고 그리고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는 그의 형제였다.
그 형제들은 예수의 권능을 믿지 않았으며, 도리어 예수를 배척하였다.(막 6:1-3, 마 13:55) 이들 형제중 야고보는 나중에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일하였으며, 그의 누이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복음서에 자주 나온다.(막 6:3, 마 13:56)
예수의 모국어는 갈릴리어와 아랍어였으며 히브리어는 종교적 특수 용어로만 사용되었었다. 그리고 예수의 복음 전파 활동은 세례 요한보다 좀 늦게 시작되었다. 예수의 공적 활동은 30세가량 되었을 때부터였으며, 그가 3년동안 천국 복음을 온 백성에게 담대히 전하였다.(눅 3:23) 또한 예수는 그의 제자를 택함에 있어 열 두 제자를 택하여 하나님 나라(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훈련시켰다.(마 10:1-3)
예수는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였으며, 율법주의자들에 모순점을 변론하고 병든 자를 고쳐주며, 많은 기적을 나타내어 사람들의 죄를 회개케 하였다. 고로 백성들은 그를 권능자 또는 메시야로 믿었으며, 오직 예수만이 죄를 심판하며,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구세주" 로 확신하였다.
즉 이스라엘이 대망하고 있는 구약선지자들이 예연한 메시야로 믿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받은 고난으로 그들의 신앙에 동요가 생기고 무력해졌으나, 예수님의 죽음에서 부활로 인해 믿음에 확증을 얻어 새로운 힘(성령)을 얻어 담대히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성령의 충만함 입은 제자들은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오리라던 메시야 즉 "구세주"라는 사실을 증거하여,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하여 유다와 사마리아에 있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행2:1-11, 40-43, 5:41-42.)
이에 정통 유대교에서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은 날로 더하여 갔다. 사울(바울)도 바로 유대교 정토를 부르짖는 열열한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사도들을 핍박하였다.
2. 바울의 성장 과정
A. 출 생
사도행전 22장 3절에 바울은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하였다. 연대는 주후 1년경이라고 한다.( The Life and Letters of St. Paul, p.22; 도양술저. [사도바울의 신학].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p.21.)
다소는 역사적인 도시였다. 주전 800년경 앗수리아의 샬만넷셀이 정복한 도시 중에 다소의 이름이 기술된 것을 보면 매우 일찍이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 같다.( Wiliam Barclay. The Mind of St. Paul. 서기간역.
{바울의 인간과 사상}, 서울:기독교문사, p.18.)
다소는 길리기아에 있으며 다소 중심으로 흐르는 시드너스강은 지중해와 다소 중간에서 넓은 호수 "레그마" 호를 이룬다. 다소 사람들은 호수 기슭에 배들이 정착할 수 있는 선착장을 건조하여 지중해를 항해하는 배들을 이곳으로 정착하도록 했으며 그뿐 아니라 그들은 길리기아 내륙지방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어 가바도기아와 갈라디아 대륙과도 빈번한 왕래가있게 하였다.
그러므로 다소는 대륙과 해상의 교통을 연결하는 동서교통의 요충지이며 무역이 활발하였다. 또한 다소는 학문의 도시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많은 학자들이 있어 다른도시에 비하여 학구열이 컸었다. 특히 "스도이고" 학파 철학자들로 유명하였다. 그러므로 다소에는 "스도아" 철학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컸고, 그들의 사상적 영향은 일반시민에게 까지 미쳤다.
감수성이 예민한 바울은 이러한 학문적 풍토속에서 넓은 시야로 인류의 세계를 보았으며 세계의 끝까지 진출하려는 꿈을 키웠을 것이라고 본다. 그는 유대주의나 율법에 국한된 사고를 벗어나 당시 세계를 풍미했던
"노스틱" 철학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후에 그가 선교활동을 하기전
다소에 머물러 있을 때 이러한 사상과 기독교 내지는 유대교의 사상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것이다.
바울은 이런 자기 출생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가 예루살렘에서 잡혔을 때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행 21:39)고 하였다. 이런 곳에서 자라난 바울의 설교도 매우 도시적이다.( 바울의 설교;
빌립보서 3장 5절에 바울은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라고 하였다. 길리기아 지방의 다소에서 출생한 그의 집안에 대하여는 알려진바가 거의 없지만 "제롬" 이 전해준 전승에 보면 바울의 부모는 본래 갈릴리의 마을인 "기사랄" 에서 로마군이 팔레스타인을 폐허로 만들때 다소로 피난했다고 한다. 그는 로마 시민으로 태어날 수 있을 정도로 부요한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베냐민 지파의 혈통을 가졌고, 그 이름을 사울이라 함은 베냐민 지파에서 출생한 최초의 왕인 사울을 따라서 명명한 듯 하다. 바울은 이와 같이 부요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나,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후에는 다 분토와 같이 버리고, 셋집에 유하며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행 28:30-31) 특히 바울의 생질은 유대인 40명이 결사대를 조직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할때에 그는 바울을 도와 구원하였다.(행 23:16-24)
바울이 다소에서 얻은 로마 시민권은 그가 전도 여행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런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을 수 있는 조건은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자들은 자기 영토내에 거주민을 크게 두 부류로 구별하였다.
① 이탈리아의 원주민을 위시하여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로마에 공을 세운 자, ② 금전 또는 정복민과 함께 온 노예들이다.
전자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부여해서 특수한 인권과 권리를 허락하였다. 이것이 어떤 명예나 지위는 아니라 하더라도 로마법에는 그들에게 체포, 구금, 매질이나, 십자가에 처형할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전도여행 중에 반대자들에 의하여 빌립보 옥중에 투옥되었을 때,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소유한 자임을 밝히자 즉시 석방되었고(행 22:24-30), 예루살렘에서는 유대인의 난동으로 가이사랴에서 구금되었을 때, 억울함을 황제에게 호소하여 정당한 재판을 받기 위해 고소
고대 세계에서는 로마 시민은 영예스러운 칭호였으며 땅 끝까지 통하는 완전 통행증 이었다. 바울은 그러한 시민권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또 그것을 자랑하였다.
( William, Barclay, The Mind of St. Paul. 서기간역,[바울의 인간과 사상], 서울:기독교문사,
p.30.)
C. 교 육
바울의 가정은 대표적인 바리새인의 가정으로 엄격한 가정교육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유대 법으로는 다섯 살이되면 성경 공부를 시작하고, 열 살이 되면 율법전승들을 공부해야 한다고 규정짓고 있다. 바울도 이 규례를 따라 다섯 살 때부터 성경을 배웠으며, 열 살 때에 유대교의 중요한 문헌들을 암송하였으며 또한 천막 만드는 기술도 함께 익히게 되었다.
유대교의 사상은 생각과 행동을 함께 할 수 있는 교육 지표를 갖고 있다. 이러한 유대교육의 목표를 본다할지라도, 이념과 실천 즉 생활 교육의 병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이 선교사역 과정에서 학창 시절의 직업교육은 그의 선교생활에 크게 기여했던 것을 잘 알 수 있다. (행 18:3, 살후 3:8)
바울은 율법을 더 배우기 위해 "가말리엘"에게 보내졌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자기 내력을 이야기한 것을 보면(행 22:3), 예루살렘에 오랫동안 거주한 것으로 말했다.
그가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바울의 스승은 아들 "시몬 가말리엘"이 아니고, 그의 아버지인 "가말리엘 1세"였다. 그는 베냐민 출신으로 바리새주의자의 거두였고, 특히 그는 개종자에게 후대함으로 그 이름이 높아졌다.( 전경연외, [신약성서신학]. 서울:대한기독교서회, p.171.)
이것만 보아도 바울은 완전한 교육을 받은 율법자이며 인정 받은 법관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항상 자기 자신을 뛰어난 유대인임을 자랑하였다. 바울을 출생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빌 3:5) 즉 그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표시로서 선민의 표시를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이라는 것과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선택받은 민족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로마서 11장 1절에서도 재삼 강조하였다. 또한 바울은 혈통적으로 볼 때 단순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그는 이스라엘의 귀족인 바리새인이었다. 즉 그는 충실한 유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별된 사람"중에 한사람었다.(갈 1:15)
오직 율법에 따라 살고 사고하는 것이 그의 생활이었다. 비록 그가 헬라문화권에 살고있었지만 일반 "디아스포라"처럼 헬라리즘에 동화되지는 않았다.(William Barclay. The Mind of St.Paul
박문재역. [바울신학개론]. 서울:크리스찬 다이제스트. pp.14,16.)
D. 성 격
바울의 성격은 강직하고 열정적이었다. 그가 노한즉 추상같고 평시에는 온화한 봄날같았다 한다. 이런 성격은 회심 전이나 회심 후에나 변치않았다. 회심 전에는 이런 성격으로 기독교인을 박해했고, 회심 후에는 또한 이런 성격으로 전도하였다.
그는 이런 성격으로 회심 전에는 스데반을 박해하였고, 또한 회심 후에는 베드로를 면책하였다.(행 8:1,갈 2:12)
그리고 교회 안의 교인이라도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거짓 사도요","저주를 받은 자들이요",
이런 일은 그의 성격이 악해서가 아니라 열정적이고, 강직한 데서 오는 것이다. 이 강직한 성격과 인격은 결국 십자가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다. 바울의 힘있는 말한마디 한마디는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서 유대인의 죄를 회개시키고, 이방인의 마음을 감화시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였다.
그의 이 강직한 성격은 전도 여행시 당한 많은 박해와 환난을 이길수 있었다. 그가 말한바와 같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니라,"(고후 4:8-10) 바울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예수의 생명이 그 몸에 있어서 넘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희랍인 이상으로 조직적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같은 치밀한 조직이나, 로마서와 같은 당당한 논설은 도저히 그시대사람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과 사랑을 소유하고 있었다.
자신을 가리켜 "죄인의 괴수", "사도중에 지극히 작은자라" 또한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하였으며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였다. (딤전1:15; 고전15:9, 13:13;
결국 그에게는 풍부한 지, 정, 의가 믿음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 훌륭한 사도로서 신학자도 되고, 전도자가 되어, 동서남북으로 좇아다니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다.
3. 다메섹도상에서의 바울의 회심
A. 바울의 회심 사건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있는 사울은 예수가 바로 다윗이 예언한 구세주이며,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고(행2:25-28, 시16:8-11, 눅24:27) 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격분하였으며, 더욱이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죽인 예수 즉 메시야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삼일만에 다시 부활케 하셨다 하며, 유대인들이 이러한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실 것이라고 하는 말에 분노하여,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거룩한 성전과 율법을 거스리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독한다하고 특히 스데반을 신문할 때 증인으로 섰고, 돌에 맞을 때에는 그가 사형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행 7:55-58, 8:1) 주장하였으며, 또한 다메섹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옥에 넣기 위해 산헤드린에서 발급한 정식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게 되었다.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 갑자기 강한빛을 보매 그는 땅에 엎드러졌다. 이 때 그는 눈을 뜰수 없었으며 홀연히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그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나이까" 하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자가 있느니라" 하셨다.
동행인들은 그 소리만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고 서 있기만 하였다.(행9:6-9) 바울과 함께한 사람들에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가 아나니야를 만나 아나니야의 인도에 따라 시력을 회복하였으며,그에게 세례받고 모든 사람 앞에서 다메섹 도상에서 보고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증인이 될 것을 지시받았다고 증언하였다.
바울의 다메섹 도사에서 회심의 사건은 사도행전에 삼회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회심의 표현이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9장 7절에는 동행인이 소리는 들었으나 보지는 못하고,
사도행전 26장 13절과 14절에는 밝은 빛이 내려와 함께 가던 사람들은 두루 비추었다 하였다.
문제는 표현하는 글에 뜻있는 것은 아닌 줄로 안다. 바울은 분명히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 "맨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느니라" 증거하였다. 그리스도인의 박해자였던 사울은 그를 복음전하는 사도로 부르시는 소명에 대한 분명한 체험을 나타내고 있다.
B. 회심의 신학적 의의
바울의 회심에 대한 의의는 전술한 바와 같이, 사도행전에 기록과 바울 자신이 쓴 서신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은 전설적이고 객관적인데 비해, 바울 자신이 쓴 서신( 갈1:15-16; 고전9:1-2; 고후4:5-6.) 에는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 안에서 체험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실상 바울의 회개의 계기는 바로 바울 자신의 주관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이방에 복음을 전파할 주의 사도로 쓰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역사였다고 하는 편이 올바른 해석이 될 것이다.(행22:21, 고전15:8-10, 엡3:7, 갈1:1, 엡1:1, 딤후1:1)
그리고 바울의 신앙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자기의 잘못된 신앙관을 깨닫고 회심한 후그의 신앙은 180도로 변한 철저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하기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믿었다.(빌 3:7-9)
바울은 회심 전에 하나님을 섬기던 율법적인 신앙관을 바꾸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됨을 확신하였다. 이러한 확신을 그는 그리스도가 그에게 나타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택정하셨다고 하였다.(갈 1:15-16) 하나님은 바울의 전 생애를 영광가운데 인도하셨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오심과 자기의 성별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라 했다.(엡 3:7-9)
바울의 이같은 확실한 신앙은 마침내 자신을 이방인들을 구하는 복음의 사도라는 불같은 사명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골 1:25, 딤후 1:9-11)
C. 부활에 대한 바울의 확신
바울 자신도 회심 이전에는 일반 유대인과 같은 사고 방식으로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기독교인들이 유포한 한낱유언비언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기존 유대 종교를 혼란시키는 이단자로 간주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예수가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다는 확증을 얻게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1-11절에 보면 그가 극적인 내적 각성을 설명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생애가 전환케 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의 신앙의 핵심이요 또한 바울의 신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전경연, [신학성서 신학서설].서울:사상계사. 1955, p.132)
바울은 부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단호하게 선언한 것은 고린도전서 15장 15절에서 19절에 잘나타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도 신학적인 교리도아니다. 그것은 바울이 직접 체험한 경험에서 얻은 최대의 사건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의 사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으며, 그의 모든 생활의 초점은 살아서 역사하시는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의 현존 안에서의 삶에 맞추었다. (갈2:19-20; 고후5:13-15; 빌1:20-213:7-9, 10-14)
4. 소 명
사도행전 1장 8절에 예수의 선교명령이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그리고 이방 지역으로 점차 확대하여 나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이방인에 전도를 위하여 하나님은 바울을 택하시고 부르셨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소명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를 단계별로 살펴 보려고 한다.
① 하나님께서 그를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모태에 있을 때 이미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택정하였다 한다.(갈1:15-16; 롬1:1)
② 다메섹 도상에서다. 예수는 바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자가 있느니라.." 하고 명령하셨다.(행9:4-622:1026:16)
③ 아나니아의 예언이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강한 빛을 본후 실명하여 있을 때 아나니아의 방문을 받았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나니아에게 예언하신대로 바울이 "이방인과 임글들과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택한 나의 그릇이라"라는 것을 알았다.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주님의 지시대로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하여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소명받음이 기록되어 있다.(행9:15-1622:14-15)
④ 이러한 사명받은 바울은 3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행22:17-21)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이 사실은 그에게 이방인의 사도로서 확실한 메시지였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이방인의 사도"(갈2:8.)라고 하였다. 다메섹에서 받은 계시로 그의 신앙의 길을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또한 다른 먼저된 사도들과도 의논하지 않고 오직 받은 계시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서만 충성했다. (갈1:16-17)
A. 사도로서의 사명 의식
초대교회의 사도에 대한 관념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준 이름이며(녹 6:13) 예수를 배신한 가롯유다
대신 한 사람을 세우고저 두 사람 유스도라하는 요셉과 맛디아를 천거하고, 11제자들이 합심기도하고 제비뽑아 맛디아를 사도의 수에 가입케 하였다.(행1:16-26.)
즉 바울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힌 생활이며, 그가 산 것은 자신의 삶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생활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은 바로 성령안에 생활이며, 생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또한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한다.(롬6:4-58-9; 빌3:10-11) 이러한 성령 안에서의 소망은 그의 사도로서의 사명 의식을 더욱 강하게 하였다.(롬8:23-255:1-5, 15:13.)
B. 선교에 대한 바울의 자각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으로 예수의 부활과 그가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특히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바울의 이방인과 유대인에 대한 선교의 필연성을 로마서 9장과 11장에 잘 나타내고 있다.
바울은 회심 후 복음 전도의 사명감을 맡은 사도로서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전도해야 할 의무감을 절실하게 느꼈다. 바울은 복음 전도만이 유일한 사명인 줄 알고 복음 전도에 전 생애를 바쳐 충성하였다.
C. 선교대상
바울은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대로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즉 이방지역을 선교 대상으로 삼고 1, 2, 3차에 걸친대 전도여행을 실시하였다. 1차전도여행(행13:1-14:28) 수리아-안디옥-실루비아구부로-비시디아-안디옥-이고니온- 루스드랴-데베-앗달리아 2차전도여행(행15:36-18:23) 안디옥-데베-브리기아와갈라디아-부시아-빌립보-데살로니가- 베뢰아-아덴-고린도-안디옥 3차전도여행(행18:23-21:16) 갈라디아-브루기아-에베소
① 유대인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열심있는 사람이며 동족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인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행 21:39, 롬 11:1) 그가 비록 이방인의 사도로 이방 지역에서 선교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자기동족들에 구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자기 동족이 이방인보다 먼저 구원 얻기를 열망했으며, 그러므로 자기자신이 자기동족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지라도 원하였다.(롬 9:3)
본래 유대인들은 하나님앞에 택함받은 성별된 민족이다. "그들은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었다."(롬 9:4)
즉,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기적적으로 탄생한 이삭으로 말미암은 민족이고, 구약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특별한축복과 보호로 약속받은 민족이었다.( 롬9:4-8; 갈3:16 (참고 창22:16-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았다."라고 로마서 10장 3절에 말하였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미화 또는 자랑하는 대에 그쳤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의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義)이다.(빌3:9)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를 믿음으로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롬3:23-261:17)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는 먼저 이스라엘을 통하여 예비되고 약속되었다. 그러나 메시야이신 그리스도가 구원을 성취하러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거부하고 마침내 구원의 섭리는 이방인에게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을 바울은 믿었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이방인들을 순교정신으로 전도하여 그 결과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이스라엘이 보고 "질투심을 불러 일으켜" 마침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끝까지 감수하려 한다고 말하였다.(롬11:7-1425-27)
그러므로 바울이 이방인의 전도자가 된 것은 이방인을 구원하려는 데에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 자기민족의 구원이 하루 속히 성취될 것을 원하였다.(바울의 심정 롬9:1-3.)
② 이방인
바울은 디아스포라(유대인)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 회심 전 오래동안 고향에서 지냈기 때문에 이방 지역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함을 자연을 통하여 알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각이 허망하여 미련한 마음이 동하여 불신과 죄로 말미암아 올바른 인식을 하지 못하고, 인위적인 우상에 맹종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그당시 세계의 부패와 타락성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강요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죄에 대한 필연적인 보응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바울에게 있어서 절실한 문제였다. (조선출, 로마서(선교70주년기념 신약성서주석 제6권) p.67.)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보음을 전할 때 이들은 복음을 받아드려 복음의 의를 발견하여 복음을 믿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롬9:30)
이것은 일찍이 예수께서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 가리라"고 하신 말씀과 같다.(마21:30; 막10:31; 롬11:7.)
이러한 이방인들에 대한 바울의 전도는 초기에는 큰 성과를 얻어 소아시아와 마게도니아, 그리고 헬라지방에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반면 기독교 교회내에는 불신앙적인 요소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해서 유대적 사상, 또는 이교도들의 습관이 교회내에 침투되어 윤리관의 혼란이 야기되었으며, 이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유대적사상, 골2:1622, 이교들의 습관, 골2:8; 딤전6:3-54:1-2.)
이에 순수한 기독교적 신앙에서 이탈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도 불신앙 때문에 버리셨는데, 하물며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떠난 생활을 할 때 버리시지 않겠는가?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서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받아 살지만 만약 그렇지 못하였다면 원감람나무도 베어버리시는 하나님께서 너희 돌갈람나무 가지를 안 베겠느냐?" 하고 경고 하였다. (롬11:17-22.) 그러므로 이방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하는 믿음의 생활을 끝까지 하라고 경고하였다.
D. 선교의 주제(메시지)
바울은 이방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복음을 전할 때 중심되는 사상을 그의 서신을 통해서 혹은 사도행전을 통해서 항상 명확히 말하고 있다. 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왔다고 강조해서 주장한다.(롬16:25-26; 갈1:112; 엡3:2-10.)
실은 그의 선교 주제(메시지)는 아주 독창적인 것이어서 그는 꾸밈없이 "나의 복음"이라고 그것을 언급한다.(고후4:3; 살후1:52:14.) 그런데 바울은 그의 설교가 다른 사도들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그는 주장한다. (고전15:11; 갈2:6-10.)
그리고 계시에 의해서 주어진 바울의 복음은 초대교회의 그것과 선포의 본질적 내용에 있어서 다른 복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이방인에 대한 직접 선교의 합법성과 하나님앞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권인정을 포함해서 말세에 구속사의 모형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대한 메시지였다. (롬16:25-26; 엡3:2-10; 골1:25-27.)
바울은 요한복음 15장 2627절과 사도행정 1장 21,22절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의 통용된 사도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그의 서신이 솔직히 인정한 것처럼 그는 기독교 전통에 많은 것을 그의 선배들에게 의존하였다.
그러나 그는 부활승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가 직접적으로 그를 사도로 임명하고 현 세대의 구속사의 모형을 아는 열쇠를 주었다.
예루살렘 사도들은 선지자적 신비의 열쇠를 가졌고 복음 선포에 있어서 자료로 살아있는 경전이었으나, 바울은 계시를통해서 직접 주님께 받았다는데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의 충만함을 위해서 서로 연합했다. (Richard N. Longenecker. The Ministry and Message of Paul, 노상국역, 바울의 선교와 메시지, pp.138,139.)
① 그리스도의 인격과 업적
바울의 메시지의 중심적 동기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업적에 있어서 인류역사 에서 그 초점을 갖는다는 것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바울은 선언한다. (갈4:4-5.)
바울의 가르침에서 그리스도의 업적은 무엇보다도 율법과의 관계에서 제시된다. "율법 아래에서" 오심에 있어서 걸머질 수 없는 자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아버지께 화목케 함으로 그리스도는 율법의 저주와 의무를 자신이 걸머졋다.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라고 한 것처럼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에 있어서 우리를 위해서 죄가 되사"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며"(고후 5:21)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 2:14)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하사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신"(골 1:22)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율법의 저주를 도말하고, 그래서 개인을 하나님께 중립적으로 제시하는 구속을 선포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리스도는 모세의 계명에서 설치된 계약적 의무의 합법적 요구를 성취했다고 주장하며, "그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위한 적극적인 의를 아버지 앞에 제시한다. (롬3:19-24)
그리스도의 복종에 대한 이해는 그의 희생의 속에 내포되어 있지만(빌 2:8), 그 행위(희생)의 교리에서 속속들이 규명되지는 않는다. 예수의 잘 알려진 목적 중에는 율법의 완성이 포함되어 있으며(마 5:17) 바울은 이 명제를 아담의 불순종을 그리스도의 복종과 대조하면서 로마서 5장 18절, 19절에서 거론한다.
"한사람의 범죄"는 "한사람의 행위"로 간주될 뿐만 아니라, "한사람의 불복종"이 "한사람의 복종"에 의해서 교정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사상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에 기초한 "의"에 대한 바울의 반복되는 강조에포함된 것 같으며, 그래서 믿음으로 그에게 응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 (롬3:22; 갈2:16; 3:22; 엡3:12; 빌3:9.)
율법의 계약적 의무가 요구하는 것을 그리스도가 마련했다. 그는 완전한 의를 제공함에 있어서 온 인류를 대표했으며 그래서 "그 안에"선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가 아니라 그 안에서 옷 입음으로 아버지 앞에 선다.(롬13:12-14; 갈3:25-27.)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 그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시고, 그의 완전한 복종으로 율법의 의무를 완성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되시니라"(롬 10:4)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복종은 바울의 마음속에서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필연적 결과이며, 그의 부활과 살아서 역사하는 성령의 임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설교할 때 그들의 종교적 관념에 속해 있던 언어를 복음적인 차원에서 표현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도의 호칭인 "주"와 " 하나님의 아들"의 사상이다. 이러한 말은 바울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헬레니즘계의 기독교인들이 사용했던 그리스도에 대한 호칭이지만 바울은 이것을 자각해서 사용했다.
이방인들의 "주"에 대한 관념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주"라 불렀고, 유대인들의 "주"사상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으며, "초월자"를 호칭할 때에 정중하고 존경하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이 "주"란 말은 종교적으로 예배의 대상을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했다. 그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다.(고전12:2-3; 롬10:9-10.)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뿐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에게 예수가 "주" 되신 것을 믿고 그를 섬기라고 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가 "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거듭거듭 거의 모든 서신의 첫머리에서 강조했으며, 그것은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데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구약에서의 "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뜻은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하는 선택받은 자를 말하고 있다.(출4:22; 호11:1; 렘3:19; 신14:2; 시73:15.)
그러나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가 " 하나님의 아들"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위임받는 아들이라고 했다
그는 복음에서의 "인자"에 대응하여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 유래한 인류가 죄와 죽음을 계승받았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과 의가 회복되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모든 권세가 맡기워진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관계를 유지하게 하였고,
하나님께 대한 인간들의 새로운 아들로서의 관계를 유일하게 하였고, 또한 하나님 앞에 유업을 이을 자라 하였다.(갈4:5-7; 롬8:14-16; 갈3:25-2629)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택함받은 백성이라 자부할 것이 아니라, 각자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음으로 참된 "하나님의
① 인간의 역사는 돌이킬 수 없게 아담에 뿌리박고 있어서 그는 요컨대 "나는 육신에(아담 안에 속하여 죄아래 팔렸도다"(롬7:14) 라고 외칠수 밖에 없으며,
② 사람의 경험은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께 반대함으로 그는 사실상 "죄의 근원인 아담이 내안 있다."(롬7:23)이다.
③ 이런 사실들은 "나는 내 자신에게 비롯했다." 즉, 사람은 그 본성과 실천에 있어서 하나님을 반역하며 그를 기쁘게 할 수 없다.(롬 7:24) ( Richard N.Longenecker, The Ministry and Message of Paul. 노상국역, 바울의 선교와 메시지 p.145.)
확실히 사람의 죄는 하나님이 전혀 예상을 불허했던 일은 아니며, 바울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은 세상의 창조이전에 창조주에 의해서 사뢰되었으며,(엡1:43:9.)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업적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기회를 준것이 죄라고 주장한다.(노상국역, 바울의 선교와
메시지, 서울:대한기독 교서회 p.145.)
이러한 죄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울은 "그러나 성경이 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에게 주려 함이니라" 하였으며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
또한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는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으며, 로마서 1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라"고 바울은 말한다.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라 한다.(롬5:8, 4:23-24)
하나님의 "의"는 바울신학의 주제이다. "의"란 말은 바울서신에 자주 사용되어 왔다. ("義"에 대해 로마서,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에베소서에서 많이 사용됨.) 바울은 "의"란 말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라 하였다. (빌3:7-9.)
구약시대 사람들은 이 " 의(義) "를 찾는 길은 율법 안에서만 가능한 줄 알았고, 율법의 노예가 되어 항상 두려움을 가지고 생활하였다. 바울 자신도 바리새인으로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되려고 노력하였으나, 회심 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깨닫게 되었다.
바울은 율법(律法)이 하나님의 기준의 표현으로서 사람의 본성과 양심속에 선언된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불가피적(不可避的)이고 어길수 없는 표현이다.(롬1:191:202:14,15) 그것은 사람이 최초에 그런 지식이 필요했던 인류 역사의 시초에 주어졌으며(롬5:14), 당시 모세의 법전에서 민족의 새로운 상황에 적용되었다.
모세의 입법이 구체적인 규칙의 형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지를 표현하면서, 또한 삶의 지침을 제공하고 사람이 거기에 미치지 못했을 때 심판의 기준을 마련했다. 그러나 율법의 이런 양상을 부인하지 않고, 바울은 또한 모세의 계약의 다른 기능을 주장한다. 즉 일종의 계약적 의무 밑에 사람을 두는 제도로서의 율법이다.
이 후자(後者)의 의미에 있어서
①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430년 후에 왔다. 그러므로 율법은 이와 같은 약속을 무효로 할 수 없다.(갈3:17)
② 일찍이 주어진 하나님의 계약 약속의 계약의 재성명으로써가 아니라(갈3:1819), 사람의 완고와 고집 때문에 구속사의 과정에서 율법이 부과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범죄를 선동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반역하는 범위를 깨닫게 했다.(롬5:20 (참고 7:5,7-11)) 적극적으로는 율법은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하나님의 선민을 지킨 일종의 관리인 역을 행했다.(갈3:105:3)
모세를 통해서 행위의 체계로서 주어진 율법이 생명과 의의 틀림없는 약속과 더불어 왔으나(롬7:10), 그 의무를 이행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때문에 약속을 받을 수 없었다.(롬8:3) 그것은 완전한 복종을 요구했으나(갈3:105:3), 그렇게 함에 있어서 사람은 그것에 따라 살 수 없으므로 율법은 사람을 저주밑에 두게 되었다.(갈 3:10)
이렇게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것으로서의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의 경험을 "율법 밖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제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대조한다.(롬3:19-21; 고전9:20; 갈3:23-255:18.)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는 의와의 관게에 있어서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롬 10:4)라고 주장하였다. 율법은 그 계약 형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에 아주 크게 이바지 했으나, 바울에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고상함"에 비하면 "해로 여김받는"것이었다.(고전3:7-18; 빌3:7-11)
역사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안목에서 볼 때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사람을 준비시켜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 주어졌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도 의를 위해 그것으로 돌아가는 것은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일이다.(갈4:39;골2:20)
바울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17)는 새로운 것을 찾았다. 바울은 죄의 반대 개념이 "의"라 확신하였다. "의"는 생명을 얻게 한다.(롬5:18.) 이 생명이란 구속받는 것이 아니고 "의"로 인정받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롬5:9 (참고 롬3:24; 엡2:8).)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율법에 대한 많은 기술의 목적은 나의 복음(롬2:16; 갈1:8; 딤후2:8; 롬16:25)을 강조하여 말하기 위함이다. 율법의 관계된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완성되고, 그것으로 인간의 구원이 성취되었다고 바울은 선언하였다.
바울은 주님의 사랑만이 율법을 다 이룬다고 말하였다. (롬13:810) 다시 말해서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므로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갈3:5-62:16.) 고로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읽지 않고 "영"으로 읽는다고 하였다.(갈5:16-18.)
③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
바울의 종말론은 구약에 뿌리박고 당대의 구상적 표현법을 사용했으나 근본적으로는 독특한 특징과 초점에 있어서 그의 기독론의 연장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때가 차매"(갈 4:4)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메시야 시대를 시작하고, 마지막 날이 그 정점에 도달할 일련의 사건들은 행동으로 표시했다.
죽은 자로부터 그의 부활과 신도의 삶 안에 성령의 임재는 전 구속 과정을 성화시키고 최후의 완성을 확증하는 "첫번째 열매"이라.( 롬8:23; 고전15:2023.)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선언과 신도들이 그들의 주님을 마중하기 위해서 공중으로 끌어올림을 받는 것은 "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으며,( 살전4:15.) 바울은 그 본질을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절에서 인용한 것 같다.
그리고 미래에 관한 바울의 사상은 그리스도의 재림종말에 중심을 두고 있으며, 그 밖의 모든 것은 그것에 관련되어 있다.
바울의 종말론은 그의 목회의 과정에서 미래의 종말에 전적(全的)인 강조를 두는 미숙한 묵시로 부터 현재에로의 성취와, 사후의 생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세련(洗鍊) 되고, 실존적 이해로 완숙된 변화를 경험했다고 흔히들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발전을 증명하기 위해서 바울서신에서 매우 자주 인용된 요인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의 저술을 통해서 대조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연립(聯立) 해 왔다는 것을 유의 (留意) 하는 것이 이(利)롭다.
이상과 같이 초기의 서신에서 그의 개종자들에게 복음주의적 설교를 통해서 미래적인 내용을 상기 시켜주고( 살전1:10.), 유대의 묵시론의 그것과 아주 흡사한 비유적 표현으로 종말을 소개하나 ( 살전4:13-5:11; 살후2:1-12. ), 바울은 믿는 자 안에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특정지어질 수 있는
( Richard N.Longenecker, The Ministry and Message of Paul. 노상국 역,
바울의 선교와 메시지. pp.160-161.)
고린도와 로마에 보낸 편지에는 죽음으로 산자는 육체를 떠나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것을 말하면서 ( 고후5:1-7.), 바울은 종말에 완전한 완성을 강하게 강조하였다.( 롬8:18-25; 고전15:12-28.)
그의 로마 옥중에서 쓰여진 서신에는 반복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있음과 "그리스도의 몸"을 언급 하지만 그는 또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갈3:2021.)라고 썼다.
그리고 또한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딛2:13.)라는 짧은 내용의 말이 있다.
바울은 그의 기독교 체험과 사역을 통해서 미래에 관한 그의 사상에 있어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종말이었다.
그리고 바울의 가르침에 있어서 종말은 맨 먼저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와의 연속적 결합과 ( 살전4:17.), 믿는 자의 몸의 부활 "그의 영광의 몸처럼 되기 위해서"( 롬8:22; 고전15:12-58; 빌3:21.)
⑥ "만물을 저에게 복종케 하신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15:28.)
예수의 역사적 성취는 완성된 일이지만 그의 적용은 전진적이며 그 정점(크라이막스)는 그리스도의 재림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부활의 삶과 "그리스도 안에" 삶을 경험하지만 육신의 장막을 떠날 때 한층 더 그의 아들 됨의 완전한 실현을 알게 되며,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의 완성인 종말을 사모하며 기다린다. 이것을 위해서 바울은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하면서 기대
바울 신학이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로 자처하던 율법주의자 유대인 사울이 예수의 추종자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메석으로 가던 도중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회심한 후 복음의 사도로서의 바울의 신앙과 그의 주장을 신학적으로 정립 표현함을 말한다.
바울은 선교 활동을 위해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교회를 세우고 이들 새로운 교회들과 많은 서신으로 문안, 권면, 격려, 지도를 하였다. 바울의 많은 서신들은 신약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사도행전은 그 내용의 절반 이상을 바울의 행적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는 복음의 교리와 복음의 윤리적인 내용들을 명확하게 제시한 개척 신학자이다. 고로 바울 사도의 서신들은 그가 신학적으로 조직적으로 기록함을 알 수 있다. 바울의 메시지인 바울서신을 각자 자신이 받은 사명적 배경 속에서 바라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진술한 교훈과그의 세부적 권면들을 꿰뚫고 흐르는 진리의 원칙들이 오늘 날에도 신앙과 실천에 대하여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처음 바울에게 영감을 주셨던 성령께서 동일한 역사로 오늘의 성도들의 마음을 지켜주고 역사하고 계시다. 오늘날 우리가 바울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사상 속에서 찾아야 한다. (바울신학을 이해하는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사 상속에서 찾아야 한다. 바울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그의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며, 또한 주님께 응답을 받으며 사는 삶이다. 또한 바울 신학은 원칙적으로 구원론이나, 교회론이나, 종말론이나, 이모든것을 그의 사상의 중심 테마인 "그리스도 안에"(구원론),"그리스도의몸"(교회론), "그리스도 안에"(종말론)에 있는 한점에다 뿌리를 내리고 거기에서 새로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롬14:7-9, 빌1:20-22, 골3:1-4).)
바울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바울의 종교관은(갈2:20; 고전15:31; 갈6:1417) 자기를 부르신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며, 또한 그리스도에게 죽기까지 순종하면서 사는 삶이다. 특히 바울의 신학은 인간학적으로 해석하려는 현대의 종교적 실존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반대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빌1:20-21; 고전2:1-52:13-14; 빌3:7-9.)
1. 바울 신학의 특색
A. 체험 중심 신학
바울은 처음부터 신학자로 출발함이 아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남 에서부터 시작했다. 그의 모든 사상은 여기에서부터 발전한다.
바울이 말하는 체험이란 인간자신의 자의적인 힘에 의한 체험이 아니라, 바울의 체험은 그와정반대로 예수가 나타나서 바울을 책망하고 넘어뜨리고 회개케하는 불가항력인 강권적 외적의힘에 의한 체험이기 때문에 그 요소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체험은 인간중심인 인본주의이며, 바울의 체험은 하나님이신 예수님 중심의 신본주의이다. 이렇게 본질상 다른 체험을 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거기에 나타난 예수를 말하며 자기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이체험 중에서 완전히 죽는 체험을 했기 때문에 자기를 말할 때에도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1; 갈2:20; 롬14:7-8.) 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는 살고 자기는 죽는 것을 항상 체험하면서, 다메섹의 체험을 생활의 필수조건으로 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의 체험은 사람들이 흔히 명상하는 가운데 무슨 비젼을 봤다는 그런 것이 아니고 전 인생이 뒤집어지는 정확하게 말해서 죽었다가 살아나는 체험이다. 그러므로 그의 체험은 다른 종류와 비교할 바 아니다.
전 인생이 개조되었다는 이런 체험은 부활하신 예수가 거기에 나타나서 이런 사건이, 발생하였음으로 체험의 주동자는그리스도이며 바울은 피동적으로 이런 엄청난 일을 당했을 뿐이다.
* 바울의 이 엄청난 사건 기록이 사도행전에 있는데 그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이 사건을 살펴보면 이 사건의 전체를 예수가 지배하고 있고, 바울은 다만 "주여 뉘시니까"라고 한마디 했을 뿐이다. 여기서 바울의 체험의 성질은 하나님측이 주동이 된 예수 중심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체험한 내용은 빛을 본 것이며 예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이 체험이 물리적, 감각적, 객관적인 것이냐? 혹은 신비적, 초감각적, 주관적인 것이냐? 또는 "환상이냐? 실제냐? 하는 문제인 동시에 "예수가 환상으로 나타났느냐? 실제적 부활의 몸으로 나타났느냐?"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결정하기 전에 바울은 다른 서신에 쓴 내용을 보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내가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고전15:89:1)는
모두 감각적으로 실제로 본 것으로 원전(原典)에서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감각적으로 본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론에 무형적 부활체를 말하고, 유형적 예수를 보았을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체험한 부활은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니...육에 몸으로 심고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적인 몸이 있느니라"(고전15:40-41)는 유형적 부활체를 말하고 있어 자기가 본 예수는 유형적, 외부적으로 볼 수 있다고 쓰고 있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물론 바울이 이끌려 삼층천에까지 갔다고(고후12:1.)하는 체험은 그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원전(原典)(원전 : 희랍어 원문 성경.)주석가는 바울의 체험을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다메섹 체험은 외적인 체험으로 돌리고 있다.(도양술저, [사도바울의 신학], 기독교문서선교회, p.33.)
B. 그리스도 중심 신학
바울의 체험중심 신학은 자연히 그리스도 중심 신학과 맥을 같이 한다. 그의 체험의 내용이 예수의 빛으 보고, 또 그를 직접 만나고, 그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체험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와 떨어질 수 없었다.
실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내던지고,(빌3:8.) 그리스도만 알기로 작정하고, 일편단심 그를 위하여 염려하고, 그리스도만 자랑하면서, 살든지 죽든지 그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 위하여 힘을 다하고, 사나 죽으나 예수의 것으로 그 생애를 일관했다
예수를 위하여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 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사십의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여행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여러번 자지도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면서 예수를 전했다.(고후11:23-27.)
이와 같이 바울은 예수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면서도,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① 다메섹의 체험이 너무도 강권적이며, 거기에 나타난 예수가 바울에게 돌이킬 수 없는 확신을 주었으며,
② 바울 자신이 예수를 이단시 할 때, 진실한 기독교인 "스데반"집사를 죽이고, 또한 예수를 핍박 했던 일을 생각할 때에 무지했던 자신을 자책하므로, 바울이 예수에게 집착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기몸에 매질을 하면서까지 오직 예수에게만 복종코자 하였다.(고전9:116;빌1:20-21.) 그리고 바울은 회심 전에 이미 예수의 교훈이나 그가 한 일들을 듣고 알고 있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의 서신에서 찾아 볼수 있다. 예수님이 만찬을 잡수신 일이나, 부활에 대한 일이나, 기타 예수님의 교훈이 많이 써있음을 볼 수 있다. (고전15:12-21,7:17,9:14; 행20:35; 갈3:1-2)
그러나 그가 예수를 알았다고 할지라도 회심 전에는 "육체대로"만 알았고 회심 후에는 "신령하게"만을 알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고후5:15-16; 갈2:19-20)
결국 바울은 회심 전에 기독교도를 열심으로 핍박한 점에서 볼 때에, 그는 예수에 대한 말을 많이 듣고 있었으나, 예수가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고, 메시야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열심으로 박해했을 것이다. 바로 이점이 보통 사람들이 넘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이다.
즉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치 않았던 모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단지 세례 요한이 예고하기는 했지만,(마3:11-12; 요1:32-34.) 그를 믿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고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한 세례 요한 자신도, 믿어지지 않아 제자들을 시켜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확인케 하였다.(마11:2-5)
바울은 회심 후에야 이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오실 메시야로 안후에는 그분만 붙들고, 살든지 죽든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으로 산다고 하면서 평생을 일관하였다.
바울 신학의 또 하나의 특색은 그의 체험에서 오는 중생을 역설하는 데에 있다. 육체적으로만 예수를 알았던 사울이 영광의 빛 가운데 나타난 예수를 보고는, 눈이 어둡게 되었고
그러나 그의 심령의 눈이 뜨면서 새사람이 되었다. 그 후 바울은 3년간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사는 동안 주님의 계시를 받아 율법주의자 사울은 완전히 죽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에는 새사람 사도 바울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중생치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을 알지도 못할 뿐더러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며, 오히려 미련하게 여겨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고로, 진노를 받을 자식이니, 이러한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심령을 새롭게 하는
중생한 새사람은 의와 진리로 지으심 받아서 그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 있고, 위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생각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인간은 반드시 자기가 다메섹에서 넘어짐같이 넘어져야 하고, 큰 회개와 중생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중생전의 사울은 예수가 한낱 목수의 아들로 보았으나, 중생 후의 바울은 그 목수의 아들이었던 예수안에 능력이 있고, 복과 부요함이 충만함을 보고 세상의 구주로 섬기게 되었다.(고후12:9; 롬15:29; 엡3:8; 엡4:13; 갈3:16.) 그러므로 중생은 바울과 예수를 관계지어준 큰 계기가 된 것이다.(갈2:20; 고후5:17; 딛3:5.)
바울은 이 중생에 대하여 자신이 쓴 서신 중에 여러번 언급하고 있다.(갈1:13-16; 고전15:3-10;빌3:5-11; 딤전1:12-16.) 초대교회도 바울의 중생문제를 중대시했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기자인 누가도 여러번 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행9:1-1822:3-15,26: 4-18.) 그래서 그가 중생을 말할 때에 그것 없이는 예수가 없고 하나님이 없을 만큼 크게 취급한 것을 알 수 있다.
D. 선교 중심 신학
바울은 자기가 받은 체험과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선교 문제가 나온다. 그리고 그 선교의 내용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고전2:1-5; 롬1:16; 고전15:9-10; 엡3:7-9; 딤1:3.)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함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말함이라 하고, 자기는 나타내지 않았다.(롬1:16; 고전1:182:1-2; 고후4:5.)
선교는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났을 때에 예수에게 직접 받은 사명이요, 오히려 이 사명 때문에예수가 다메섹에서 바울을 붙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후일에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으리니"(고전9:16.)라고 하였고, 그의 3회에 걸친 전도여행은 당시의 세계판도로서는 최대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며 새 교회를 세웠고, 남이 세운 터 위에는 일하지 아니했다.(롬15:20.)
그의 전도 대상은 유대인과 이방인이였으며, 앉은 뱅이를 고쳤고, 무녀에게도 옥졸에게도 아데네의 철학자들에게도 상선의 선객들에게도 로마의 옥 중에서도 전도했다.(행13:42-4614:816:1629-32, 17:18, 27:22-25, 28:23, 30-31.) 그는 전형적 전도자로서, 그 사명을 위해 담대하였고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선한 뜻으로 생명조차 아끼지 아니하면서 전도에만 열정을 다바쳤다.(빌1:20; 딤후4:2; 빌1:15; 살전2:8; 골1:28-29.)
그리하여 그의 선교중심 신학은 자연히 교회중심 신학과 연결된다. 선교하면서 교회를 세웠고, 교회를 위하여 서신을 썼다. 바울은 그가 세운 교회들을 흠이나 티가 없는 영화로운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보고(엡5:26.) 사랑하였다.
그래서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찾아가기도 하고 편지를 썼다. 그의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었고, 그가 쓴 서신들은 자기가 전한 예수의 몸인 교회를 돌보는 일이었다.
바울사상에 어떤 요소가 있느냐 하는 문제는 또 하나의 문제가 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에게는 유대적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대인으로 랍비교육을 받았다. (랍비..유대인들이 교사를 부르는 존경의 칭호이다.(선생의 칭호), (참고. 마23:1-8).)
그래서 그의 서신중에는 랍비들이 잘 쓰는 어투와 논리의 방식이 들어있다. 즉 개념과 개념을 대립시키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래서 사상과 사상을 엄밀히 구분시키려는 것이다.
죽음과 생명, 옛 사람과 새 사람, 율법과 복음, 육과 영, 멸망과 구원, 아담과 마지막 아담(예수),등과 같이 문제를 대립시키면서 결국에는 모든 문제를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즉 바울은 자기의 다메섹 체험을 분기점으로 삼고 대조적 방식으로 표시했다. 로마서 7장의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을, 대조하면서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2장에는, 세상 지식과 십자가의 도를, 대조시켰다.
이 대조의 개념은 고린도전서 15장 40-44절에서는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죽은자의 부활도이와 같으니, 썩을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한 영적인 몸이 있느니라" 하였다.
고린도후서 4장 8-10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다 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림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 함은 그의 대조 개념을 능숙한 수사문장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바울의 문장에서 그의 독특한 인생 체험을 기초로 하면서도 유대적 요소로 희랍적 어떤 문학에 못지 않는 글을 쓰고 있다. 바울의 문장에는 희랍적 문학서와 달라서 질적으로 상반되는 것들이 서로 교차하고 있어서, 이 세상 문학에 비교할 수 없다.
희랍문학은 세상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만을 말하고 있지만, 바울의 서신은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세상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논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이, 섞여 있어서 실로 황홀하고 생명력 있는 입체적인 파노라마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서신을 단순한 서적과 같이 철학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격하 시키면,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중요한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진리를 놓치게 된다.
바울의 편지는 교회 앞에서 낭독되었고,(살전5:27) 교회에 문제가 있어서 시끄러울 때에 그 문제의 해결과 교회의 통일을 위하여 썼기 때문에 설교적이고 권면적이다. 때로는 지나친 표현의 경우도 있으나, 그것은 신앙의 열정과 감정의 표현이며 신앙을 가지고 보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지장이 안된다. 신앙 있는 사람에게는 이론보다 은혜를 더욱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서신 중에 부활사상이 강하게 강조되고 있는데, 바울에게 있어서 이 부활사상은 잊을 수 없는 그의 다메섹에서의 경험때문에 그에게는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이고, 또한 부활사상은 그
바울은 어렸을 때부터 율법의 교육을 받고 다메섹에 이를 때까지 그것 하나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회심 후에는 율법에서 벗어났으나, 그 교육의 흔적은 전서신 중에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을 강조하나 오히려 그 율법을 포함한 구약 성경은 전부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다고 했다.(롬1:1-4, 3:21, 4:18-24, 15:4-6; 고전9:9-10, 10:1-4; 행26:21-23.)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창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다."(고전 2:7)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로 하여금 예언되었고, 때가 차매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것이다.(갈3:4-5.)
그런고로 율법을 쓴 모세라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준비된 자에 불과하고, 또한 그리스도는 전 생애를 통하여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은 것이나, 삼일만에 다시 사신 것도 성경대로 성취된 것이고, 기독론의 근본 문제와 믿음으로 구원 받는 구원의 대교리와 율법의 효용도 다 구약 가운데 있다고 한다.(율법의 완성 -마5:17; 성경대로 성취 -고전15:3-4; 기독론의 근본 -고후5:14;
많은 곳에서 바울은 "기록하였는데"라고 하면서 구약(율법을 포함)을 자유롭게 응용하며, 유대교의 율법을 기독교의 복음으로 재생하였다.
동시에 구약 중의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신약교회의 신앙의 조상으로 바꾸어 놓았다.(갈3:26-19.)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22절 이하에서 아브라함의 처 사라의 아들과 그첩 하갈의 아들을 구별하여 전자를 자유의 아들, 영의 아들, 새 예루살렘의 아들로, 비유하고 후자 하갈의 아들을 노예의 아들, 율법의 아들로, 비유하고 있다. 이러한 비유법은 율법 배후에 숨어있는 그 깊은 뜻을 찾아
내려고 하는 바울에게 필요한 방법이었다.
C. 신비적 요소
칼빈은 구원받은 자가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이 없으면 헛된 것이라고 역설했다고 한다. 바울은 어디서 신비적 요소를 얻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의 신비적 요소는 다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면 신비적이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슈바이쩌 박사는 신비주의를 정의하여 "인간이 지상적인 것과 초지상적인 것,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것 사이에 격리를 극복하게 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지상적인 것 가운데 있으면서, 초시간적인 것 속에 들어가 있다고 체험하는 경우 거기에 신비주의가 있다."고 말했다.
바울이 신비적 요소를 제일 잘 나타내는 말로서 "그리스도 안에" 이말은 그리스도와 바울의 밀착을 한마디로 잘 나타내는 말로서 서신중에 164회나 사용되고 있다한다.
그러나 보다 더욱 신비적인 말은 "세례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산다"는 것이다.( 다시산다.) " 그 밖에도 "만일 너희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나니와.....주와 합한 자는 한 영이라.....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이상의 모든 말씀들은 요약하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죽었고,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해서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관용과 인내와 모든 좋은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