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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리 / 유월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기쁨조미료25 2009. 7. 9. 18:03

기독교 교리 / 유월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 다음의 글은 도서출판 "두루마리"에서 펴낸 「다시 보는 성경」에 있는 글입니다. 무단으로 복제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고 인용하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히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유월절을 지킨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 땅 위에서 유다인들이 가는 곳마다 그들은 이 날을 자기들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날로 기념합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개입한 것을 기록한 성경의 사건 중 가장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한때 파라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노예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노예인고로 그들은 자유를 원했지만 자유를 위해 투쟁할수록 속박의 굴레는 점점 더 강하게 되었습니다(출 1:13,14).

 

그리고 절망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간구하기 시작했고(출 2:23∼25), 하나님께서는 모세라는 구원자를 보내서 그를 통해 파라오에게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으로 가서 나를 섬기게 하라"(출8:1).

 

사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이집트를 위해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이집트 또한 그들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나일강의 물이 아니고 요르단강의 물을 마시도록 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속박의 상태에서 태어났지만 그들은 자유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가 그들의 땅이 아닌 타국에서 낯선 자가 될 것이며 거기에서 400년 간 고통을 받다가 그 후에 많은 재물을 갖고 거기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5:13∼14).

 

드디어 그들을 구원하여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갈 시간이 오자,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의 그들의 운명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만드사 파라오의 마음을 자극시켜 그들의 짐을 증가시키게 했습니다.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구원하는 것은 죄의 속박으로부터 죄인을 구원하는 것의 모형이므로, 이에 대해 자세히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집트는 악한 현 세상의 모형입니다. 모세 당시에 이집트는 세상적인 영광과 호화로움의 최고의 표본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렇게 놀라운 영화를 지닌 국가가 없었고, 그 안에는 더 세상의 부와 예물과 상업이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그 유물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안에는 부족한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 모두를 충족시켜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집트도 가나안과는 비교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은 무화과와 석류의 땅이었고, 올리브 기름과 꿀의 땅이었으며, 새로운 곡류와 포도주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신8:8-9).

파라오는 사탄의 모형입니다. 이집트는 우상들로 가득찬 사탄의 요새요, 모든 종류의 죄악의 온상이었습니다. 힘으로 이스라엘을 소유한 파라오는 그 상태를 영구히 지속시키려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죄인들에게 행하는 일인 것입니다. 사탄의 사역자들은 죄인들로 하여금 강한 굴레 속에서 땀을 흘리게 만듭니다.

모세는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미리 앞서서 자신의 구원을 준비하신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구원은 하나님께서 나중에 궁리해내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역을 위해 광야에서 이미 모세를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은 하나님의 왕좌를 경유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전화를 걸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통화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어떤 상황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다. 사실 그분의 예지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준비시키셨습니다.

 

모세가 이집트에 다시 나타나 그의 사명을 알리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는 노동 운동가로 간주되었고 파라오는 이스라엘의 자녀들의 짐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이와 같이 사탄은 자기로부터 멀리 떠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길을 어렵게 만듭니다.

파라오가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떠나는 것을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손을 드사 이집트에 재앙들을 통한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재앙들의 목적은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이 이집트의 신들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더 강하시다는 것을 직접 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재앙들은 회수로 10번이었고, 약 1년이 넘는 기간에 따로 따로 일어났습니다. 처음 것과 마지막 것을 제외한 나머지 재앙들은 이집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매우 평범한 자연 현상이었습니다. 단지 기적적인 사실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매우 가혹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열 가지의 재앙들은 이집트의 신들에 대한 심판들이었습니다.


1. 피로 변한 물 - 나일강, 즉 강물의 우상에 대한 심판 .

2. 개구리들 - 개구리들을 경배한 것에 대한 심판.

3. 이 - 땅의 신인 셉과 벌레를 숭상한 제사장들에 대한 심판.

4. 파리들 - 태양신인 라의 아들인 수 신, 곧 공기 신에 대한 심판

5. 역병 - 신성화된 황소인 아피스에 대한 심판.

6. 종기 - 수테크 또는 티폰에 대한 심판으로 이들에게 바쳐진 희생물의 재물이 공기 중으로 흩어짐.

7. 메뚜기 - 신성화된 풍뎅이에 대한 심판.

8. 우박 - 수신에 대한 심판.

9. 암흑 - 파라오가 자신의 아버지일 것이라고 여겼던 태양신 라에 대한 심판.

10. 장자의 죽음 - 히브리인의 모든 사내아이들을 나일강에 버리라는 명령을 내린 대규모의 유아 살해 죄를 지은 이집트 민족에 대한 심판(출1:22).

처음의 아홉 가지 재앙은 각각 세 재앙씩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각 그룹의 처음 두 재앙에서 파라오는 경고를 받았지만, 마지막 재앙에서는 어떠한 경고도 받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두 그룹은 단지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으며, 이집트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똑같이 영향을 주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단지 이집트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쳤고 이스라엘의 가축들은 희생예물로 남겨졌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또한 재산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세 번째 그룹은 주로 이집트 사람들에게 떨어졌고, 고센 땅에는 우박도 없었으며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그들의 거주지에서 햇빛을 보았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의 타협안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서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이에 파라오는 "주가 누구관데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주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5:1,2)고 응답했습니다.

 

그러자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에게 광야에 3일 간 여행을 가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파라오는 이를 거절했고,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는 시간낭비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자녀들의 짐을 더욱더 가중시켰습니다. 그러나 처음의 세 가지 재앙이 지나간 후, 파리의 재앙이 이집트인들에게만 닥쳐오자, 파라오는 이제는 협상할 때라고 생각하여 모세를 불러 말하기를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출8:25)고 했습니다.


첫 번째 타협

파라오는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자신의 권세가 미칠 수 있는 이집트에 남아 있기만 한다면, 그 땅에서 이따금씩 희생을 드리는 것을 반대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탄은 우리가 여전히 세상에 머무르는 한 종교적으로 열심을 내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만일 파라오의 생각대로 되었다면,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결코 이집트를 떠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모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주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이집트 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이집트 사람의 목전에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출8:26). 신성화된 황소인 아피스(Apis)는 이집트의 신들 중의 하나임을 우리는 이미 살려 보았고, 만일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그 땅에서 주님께 소들로 희생을 드린다면 그것은 이집트인들에게 가증함이 될 것이므로 그들은 이집트의 신들을 죽인 것으로 인해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입니다.

 

이 타협이 주는 교훈은 세상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파라오의 제안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주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하나이다"(출8:27). 파리 재앙이 견딜 수 없는 것이었기에, 파라오는 두 번째 타협안을 제안하였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출8:28).

 

여기서 주는 교훈은 당신의 위치에 서서 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은 타협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제안은 처음 것보다 더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파라오는 만일 그들이 멀리 떠나가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을 다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 매우 쉬우리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그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 교회에 가도 좋아. 그러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마라. 사순절을 준수하고 다른 종교적인 절기들을 지켜도 된다. 그러나 그 해의 나머지 동안에는 쾌락을 즐기면서 이집트(세상)로 되돌아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무 멀리 가지 말라"는 말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부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유부단한 삶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만나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기호는 오이, 마늘 그리고 양파를 먹음으로 인해서 망가져 버렸고, 그들은 옛날 이집트에서 식단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영적인 음식에 기쁨을 느낄 수 없을 때, 그들이 옛날 세상 음식을 갈망할 것은 뻔한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해 볼 수 있는 음식 중 가장 맛이 없는 것은 아마도 만나와 양파를 섞은 음식일 것입니다. 이집트의 개라도 이것을 먹지는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은 하는 게 옳은 가요, 옳지 않는 가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게 될 때, 당신은 그들이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타협에 걸려 넘어졌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타협 사이에 역병, 종기와 우박 재앙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파라오의 종들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주 하나님을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이집트가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출10:7).

 

이에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가서 너희 주 하나님을 섬기라. 갈자는 누구 누구뇨?" 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모세는 "우리가 주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출10:9).

 

그들은 희생을 드리기 가축과 짐승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나 파라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남자들만 가서 주를 섬기라." 파라오는 만일 남자들이 자기들의 사랑하는 자들을 이집트에 남겨 두고 떠난다면, 머지않아 되돌아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 타협안은 '만일 원한다면 노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도 좋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되라. 하지만 당신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니까. 그들에게는 그들의 쾌락을 즐기도록 하고 당신은 그들의 구원에 관해서 어떠한 관심도 보여주지 말라."고 많은 사람들이 제안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다시 이것을 거절했고 그 이후에 메뚜기와 암흑의 재앙이 뒤따랐습니다. 이 재앙들은 파라오에게 매우 혹독했기에, 그는 모세를 다시 불러서 네 번째 타협안을 제안했습니다. "너희는 가서 주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두고 너희 어린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출10:24). 파라오가 나약해지고 있는 것을 본 모세는 이제는 자기들이 떠나는 것을 위해 그들이 무엇인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왕이라도 우리 주 하나님께 드릴 희생과 헌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취하여 우리 주 하나님을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주를 섬기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출10:25,26).

 

사실 그들은 어떤 희생물이 필요한지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희생물에 관한 율법은 그들이 시나이(시내)산에 도달할 때까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협상안은 "그리스도인이 되라. 네 혼을 하나님께 드리라. 그러나 너 자신을 위해 네 재산은 따로 가지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세상에서 수지맞을 투자물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들을 남겨두라. 당신의 주식을 팔지 말라. 그것이 가난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일지라도 큰 지분을 벌어들일 그러한 투자들을 포기하지 말라." 많은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서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청지기직을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교회는 빚으로 허덕이고 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돈을 부를 증가시키는 목적을 위해 세상에 투자하고, 선교헌금은 점점 모자라는데 그들의 소 떼와 양 떼는 이집트에서 살이 찝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세의 고상한 본보기를 따라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발굽하나라도 뒤에 남겨 둘 수 없습니다." 네 번째 타협안을 거절하자, 모세는 다시 파라오를 볼 때는 죽으리라고 경고를 받은 뒤 파라오의 면전에서 물러 나왔습니다. 그것이 파라오에 대한 은혜의 날의 끝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열 번째 재앙이요 마지막 재앙인 첫태생의 죽음이 뒤따랐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빠져 나오려면 죄인이 반드시 거절해야만 하는 타협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고 어떻게 피로 대속 받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월절

구약에서 하나님의 "권능"의 표준은 이집트 탈출이었지만, 그분께서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전에 그들은 먼저 피로 대속 받아야 했습니다. "유월절"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계획"에 대한 아름다운 실례인 것입니다.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되셨음이라"(고전5:7).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을 구원했듯이,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는 우리를 구원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가 너희 조상에게서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생활방식에서 대속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의 피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고센땅"에 거주했고 그 땅은 이집트의 일부였으므로, 그들은 모든 "첫태생"을 죽이는 "이집트에서의 최후의 심판" 하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재앙을 면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흠없는 일년된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취하여 그들이 사는 집의 문 양쪽 설주와 안방에 뿌려 바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정한 날 밤에 주께서 그 피를 보시고 그 집을 그냥 건너가서 피로 표시된 문 뒤에서 보호를 받는 첫태생은 죽이지 않으실 것이라고 지시하신 것입니다(출12:1-28).

 

유월절은 이스라엘에게 "달들의 시작"이 되었습니다(출12:2). 그들에게는 그것이 그 해의 첫 번째 달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을 때까지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까지 그는 허물과 죄들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있는 것입니다(엡2:1-3). 죄로 가득한 지난날들과 끊어 오르는 육체의 정욕 가운데서 보낸 시간은 믿는 자의 생애에서 없었던 것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구원의 수단으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고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지 않을 때에는 어느 누구도 구원의 손길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은혜였습니다. 대속은 하나님께서 임시방편으로 생각해내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어쩔 수 없는 상황들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구원계획을 미리 예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세 전에 인간들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미리 예정되셨습니다(벧전1:18-20). 유월절은 두 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희생물과 만찬입니다.


1. 희생물

"희생물"은 어린양이었습니다(출12:5). 예수님께서는 유순함과 순결함의 상징인 어린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어린양은 일년된 수컷이어야 했으며,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만일 그 위에 하나의 점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희생물로 부적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흠이 없으셨으며, 그분은 절대적으로 죄가 없으셨습니다(고후5:21; 요일3:5).

그분은 베들레헴에서는 아기로서, 나자렛에서는 소년으로서 그리고 "사람의 아들"(인자)로서 완전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침례를 받을 때,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마3:17)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으며, 이 말씀은 예수님의 소년시절로부터의 생애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요18:38). 그리고 가룟 유다도 "내가 무죄한 피를 배반하여 넘김으로 죄를 지었다"라고 탄식했습니다(마27:4).

 

어린양은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출12:6). 어린양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그것을 쓰다듬으며 자기들이 얼마나 그 어린양을 사랑하는지 하나님께서 보여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죽음의 천사가 볼 수 있도록 어린양을 문에 매어 놓는 것으로도 충분치 않았습니다. 어린양은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에 의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그분의 죽으심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지 않으셨다면, 찢어진 휘장도, 흘린 피도, 열린 무덤도, 중재하시는 대제사장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은 그분의 본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채찍을 맞음으로 인해서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셨으니, 이는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로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벧전2:24).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신 곳은 말구유, 요르단 강, 광야 또는 겟세마네 동산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 위에서였습니다.

어린양은 단순히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피와 살로 무엇인가를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피를 취하여 자기 집의 양쪽 문설주와 안방에 그것을 뿌리고, 그 살을 먹어야 했습니다(출12:7). 그들의 "첫태생"은 단순히 피를 흘리거나 피를 대야에 담는 것만으로는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피를 "취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으며, 피를 사용해야 했고, 그들은 어떻게 그것을 사용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우슬초" 다발에 묻혀 그들의 집 문에 뿌려야 했습니다.

 

우슬초는 평범한 식물이며, 이집트의 어느 곳에서나 자랍니다. 그들이 우슬초를 얻기 위해 외국에 가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슬초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믿음은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믿음이 없이는 어떠한 상업적, 사회적 또는 가족관계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피를 "문지방" 위에 두거나 그 집의 마루 위에 뿌려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매우 값지고 신성한 것이었으므로 발에 밟혀서도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를 경시하는 불신자들과 종교교사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짓밟고 있으며 그분의 피를 가치 없게 생각합니다(히10:29). "제사장"중에서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위한 대속을 얻는데 어떤 역할을 맡은 자가 없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유월절은 "제사장에 의한 희생의식"이 아니었고, 그 집의 가장이 어린양을 죽여서 그 피를 문 위에 뿌려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피는 표시었습니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이 표시는 "개인적인 가치"나 "선한 행위들", 혹은 "도덕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에 대한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 이스라엘 민족은 구원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지만 구원받았고, 그 구원은 부분적인 구원이 아니고 완전한 구원이었습니다. 만일 그 피 뒤에서 보호를 받은 첫태생들 중 머리카락 하나라도 해를 입었더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공허한 것이요, 어린양의 피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입증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피를 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께서는 독자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피를 적용시킨 적이 있습니까?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구원을 얻는다고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 피를 보시는 것뿐입니다.

이 피를 적용했으므로, 다음 단계는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출12:22). 피가 문에 있었을지라도 죽음의 천사가 지나갈 때까지는 처음 난 것 중 집밖에 있는 것은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수단인 유월절을 경시했습니다만, 이런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그 다음날 아침에는 웃지 못했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복음의 구원 계획을 조롱하고 피를 무시하지만 그들은 심판 날에 결코 웃지 못할 것입니다.


2. 명절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로 태우라"(출12:8-10). 그들이 피로 구원은 받았지만, 어린양을 죽여서 그 피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린양을 먹어야 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어린양을 먹는 데는 실패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생활에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여 힘들어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또, 우리가 어린양을 아무렇게나 먹는다면 참된 교제관계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어린양을 날것으로 먹거나 물에 적셔서도 안되며 반드시 불에 구워서 먹어야 합니다. 그것을 굽기 위해서는 "쇠꼬챙이"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즉, 그들은 쇠막대기로 어린양을 세로로 뚫어 불 위에 놓아야 했고, 또 하나의 쇠막대기로 직각 방향으로 어깨죽지를 뚫어 그것을 돌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분노의 불"에 맡겨졌던 것은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주님의 만찬을 행함으로써 그리고 말씀을 공부함으로써 믿음으로 그분의 몸을 먹는 것입니다(마26:26-30; 고전11:23-26).

 

오늘날의 문제는 이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에 "처형된" 어린양을 먹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어린양을 먹는데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좋은 모범으로서 따르려고 합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반대편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처형당하시고 영화롭게 되신, 그리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대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뜸씨(누룩)가 없는 무교병과 함께 먹어야 했습니다(출12:8). 뜸씨는 악의 상징이므로 유월절과 같은 만찬 때에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악의와 사악함의 묵은 뜸씨를 떼어 내어버리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고전5:7-8).

그들은 또한 "쓴 나물"을 함께 먹어야 했습니다. 이는 이전 이집트에서의 속박을 상징하며, 그들은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겨 두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어린양을 먹기 위해 잠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만일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그것이 합당치 못한 손에 떨어지지 않게, 그리고 급히 출발할 때 뒤에 남지 않게 태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운 폭풍우가 한밤중에 이집트를 휩쓸고 있었고, 그 피로 보호받지 못한 모든 집의 첫 태생을 멸절시키고 있었을 때,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평화롭고 즐겁게 구운 어린양을 먹으며 만찬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허리에 띠를 두르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만찬을 먹어야 했습니다(출12:11). 그들은 사망과 암흑과 심판이 내려진 이집트를 떠날 준비가 된 사람들처럼 그것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허리에 띠를 두르고 발에 신을 신은 것은 그들이 나가서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순례자들"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비록 그들의 순례여행이 그들을 홍해와 광야를 통과하도록 만들었을지라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지루하고 길지라도, 대속 받고 선별된 백성들의 목적지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바로 가나안임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집트로부터 가나안까지의 이스라엘의 자녀들의 여행은 구약성경의 '순례자의 여행'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신약성경에 묘사된 그리스도인의 순례여행을 아름답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그분의 피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자료출처 : 도서출판 "두루마리"에서 펴낸 「다시 보는 성경」+ 신학자료 + 그리스도 예수 안에(http://www.inchristjesus.net), 성경말씀 자료는 '킹제임스 흠정역성경(그리스도 예수 안에, 생명의 말씀사)'에 기록된 번역본입니다.

 

http://sangsuk1.tistory.com/2956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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