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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과 공관복음서의 차이

기쁨조미료25 2009. 4. 25. 15:18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서의 차이

 

1.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서의 차이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들과 똑같이 \"복음서\"라고 하는 문학적 쟝르에 속한다. 요한복음에도 공관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기적 사화들이 그의 교훈적 활동에 대한 이야기들과 나란히 제시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요한복음의 저자가 공관복음서에 관해 전부, 혹은 일부를 알고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학자들은 아직도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료의 문체와 표현에 있어서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서 사이에 명백하고 직접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학설로서 요한이 마가와 누가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한 듯 하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독자적인 자료가 많은 걸로 보아서, 그 두 복음서가 요한복음의 기초자료는 아니었던 것 같다. 결국 이러한 사실들은 요한복음의 형식적인 근거들에 의하여 공관복음서들과 세가지 면에서 구별된다고 할 수 있겠다.

첫째는 지리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세 복음서에는 예수가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활동하다가 마지막 일주일을 예루살렘에 체류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이에 반하여 요한은 최소한 세 번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2:13, 5:1, 7:10) 그 대부분이(7:10ff)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의 예수에 대해서 서술되고 있다.

둘째로 공생애 기간중의 유월절 방문기록에 대한 차이이다.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공생애에서 두 번 유월절이 반영된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유월절이 세 번 언급되고 있다(2:13, 6:4, 11:55). 여기에 더하여 요한의 기사에 의하면, 예수는 5장 1절에서 이름이 밝혀지지 아니한 어떤 절기동안, 그리고 7장 2, 10절에 나오는 장막절 동안, 그리고 10장 22절에 나오는 수전절 동안에 예루살렘에 있었다. 사실상 요한의 기사에 따르면 예수는 10장 22절에 기록된 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다시 떠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적으로 말하자면, 수전절은 겨울철이다. 사실상 이 절기는 12월이고 유월절은 4원 중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의 이야기 안에서 예수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은 며칠동안 체류한 것이 아니라 몇 개월 동안 체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세번째로 사상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은 문체 뿐만이 아니라 그 신학적 내용이나 개념들까지 공관서와는 많이 다르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공관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고 본다면 오히려 요한은 영생과 생명에 그 주제가 있으며, 공관서는 미래적인 종말을 강조한데 반하여 요한은 현재적인 종말을 강조하고 있으며, 공관서는 율법논쟁이나 윤리적인 삶을 강조하는데 반하여 요한은 상대적으로 율법논쟁, 윤리적인 삶의 교훈이 약하며 교회와 회당에 대한 확고하게 다른 입장에 서 있다. 그리고 공관서에서는 이원론적인 개념을 찿아볼 수 없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빛과 어두움\' \'참과 거짓\', \'생명과 죽음\' 등 이원론적인 개념들이 사용되고 있다.

네번째로 공관서와 요한 복음의 차이를 알기쉽게 표현해 보자면 세 복음서가 예수의 사진이라고 한다면 요한복음은 예수의 초상화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세 복음서가 신문의 1면 헤드라인이라 한다면, 요한복음은 신문의 사설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세 복음서와 요한복음의 차이는 서문에서부터 분명하게 나타난다. 요한은 이야기식으로 쓰여진 공관서 자료에서 수난에 관한 자료만 제외하고는 최소한의 것만 선택하였다. 예를 들어, 비록 많은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자료상으로 공통적인 것들은 제자의 부름(1:35ff), 왕의 신하와 아들 치료(6:1ff, 16ff), 베드로의 고백(6:66ff), 예루살렘 입성(12:12ff), 최후 만찬(13:1ff)과 수난사의 일부이고 그 외에 성전 숙청과(2:13ff)과 베다니에서의 기름부음(12:1ff)이라는 아주 단편적인 보도도 있기는 하지만, 공관서와는 아주 다른 연관성을 지닌다.
이에 반해서 공관서에는 전혀 없는 기적 설화들이 있다. 가나의 혼인 잔치(2:1ff), 베데스다 연못에서의 병자 치유(5:1ff), 날 때부터의 소경 치유(9:1ff), 나사로를 살린 일(11:1ff), 그리고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3:1ff, 4:5ff)는 오로지 요한복음에만 나타난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만 나와있는 독특한 비유가 둘이나 있는데, 목자의 비유와 포도나무의 비유이다.



2. 본문 주석의 문제



공관서와 요한복음서의 관계를 굳이 앞에서 살펴 본 이유는, 우리가 오늘 주석해야 할 본문인 요한복음 2장 13-22절에 기록된 <성전 정화>에 대한 단편 자료가 비단 요한복음서에만 나오는 독립된 특수 자료가 아니라, 세 복음서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본문을 주석하기 이전에 우리가 직면하지 않으면 안되는 더 중요한 문제는, 자료상으로 공통적이기는 하나 요한복음서의 기사가 공관서와는 아주 다른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요한은 \'성전정화로 알려진 이 사건\'을 예수의 공생애 초기에 설정하고 있는데 반하여 다른 세 복음서에는 이 사건을 후기에 설정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오늘 우리에게 이 본문에 대한 해석의 작업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지금부터는 성전정화 본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거론된 학자들 사이의 다양한 해석들을 먼저 살펴보자.

첫째, 예수는 선교 시초에 한 번 그리고 선교 마지막에 한 번 성전을 방문해서, 모두 두 번 성전을 정결케 하였다는 해석이다. 즉 요한이 제시한 본문은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이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사건의 기록이라고 보는 것이다.

둘째, 예수의 선교 초기에 이 일이 일어난 것으로 된 요한의 기록이 옳고 세 복음서 기자들이 틀렸다는 해석이다.

셋째, 요한이 죽을 때 그는 자기의 복음을 완료하지 아니하고, 또 서로 따로 따로 분리된 파피루스에 여러 가지 사건들을 기록해 가지고는 한 데 묶지 아니한 채 죽었다는 해석이다. 그래서 이 사건의 이야기가 기록된 단편이 그 위치에서 빠져서 이 사본 끝 부분에 삽입되지 아니하고 처음 부근에 삽입되었다는 것이다.

넷째, 요한복음서 기자가 각 구절에 병행법을 이용해서 글을 짜임새 있게 하기위한 편집상의 의도였다는 해석이다. 다시 말하자면, 저자 요한은 성전정화 기사를 지금의 그 자리에 둠으로써 18-19장의 수난기사와의 병행을 성립 - 예수의 몸인 성전이 수난으로 허물어지는 사실적 기사 - 시킨 것만이 아니라, 4장 19-25절에서 예수께서 언급하실 \'새로운 예배\'의 주제를 등장시킬 자리를 마련하며, 또한 성전이 중심인 유대인의 절기가 5-10장의 예수로 대치되어야 할 중요 이유를 제공하는 기능이 되는 부분으로 해석한다. 특히 이 부분에 있어서 다드(C. H. Dodd)는 요한복음 2장 1절에서 12장 50절 까지의 큰 테두리 안에서, 적어도 요한이 어떠한 특징적인 양식(Form)을 이용하여 자료들을 재구성 하였다고 본다.

다섯째, 요한복음서 전체를 공관서와 비교해 볼 때, 저자가 사건 자체의 사실성 보다는 진리에 관심이 컸다는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저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야로 나타내기 위하여 이 기사를 자신의 복음서의 서두에 두었다. 그것은, 예수는 인간이 드리는 예배를 정결케 하며 하나님께 이르는 문을 열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메시야라는 놀라운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신학적이고도 문학적인 의도였다는 해석이다. 저자의 커다란 관심은 예수의 행위는 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임을 입증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의 메시야가 행해야 할 행동을 취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의도적인 작업이었다는 해석이다.



3. 구 조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의 본문 차이점 : 요한의 기사는 마가의 기사와 비교하여 \"소와 양\"의 관한 언급이나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고\"나 \"돈 바꾸는 사람\"에 관한 말들이 \"돈을 쏟으시며\"라고 되어 있는 점과,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하신 것이나 특히 요한의 \"돈을 쏟으시고\"는 공관복음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사56:7과 렘7:11을 인용하신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반하여 요한은 예수께서 아무런 인용의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시69:9을 상기하였다고 요한은 첨부하였는데 이것에 대하여 공관 복음은 제자의 상기에 관하여 어떠한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요한은 마가복음이 말하고 있는, 지름길을 이용하기 위하여 기구를 가지고 성전을 지나다님을 금하신 말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마가는 예수께서 \"비둘기 파는 상인들의\" 의자를 엎었다고 하였으나 요한은 이것들을 가지고 나가라 하신 것으로만 되어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우선 여러 자료를 통해서 볼 때, 요한 기자는 공관복음서 기자와는 다른 입장에 서 있었음이 분명하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에 있어서 성전정화의 사건은 예수의 공생에 후기에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요한 기자는 신학적이고 문학적인 의도를 가지고 성전정화 사건을 공생애 초기에 설정하였음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기자는 공관복음서 기자들에 비해서 시간적인 사건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미미하게 여겨진다. 이와 같은 사실이 \"요한복음이 믿을 만한 역사적 자료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요한기자에게 있어서 사건의 역사적인 배열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사실에 대한 신학적 작업과 재구성(re-construction)이 더 중요하였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특히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대조를 통해서 나타나는 차이점을 보더라도 이러한 사실은 쉽게 발견된다.
공관서와 요한복음에 각각 기록된 성전정화의 기사가 조금씩 차이를 보여주고 있지만, 더 명확한 차이는, 요한복음서와는 다르게 공관서에는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에게 표적을 구하는 기사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서의 전체 문맥으로 조망해 보았을 때 요한은 성전정화 사건도 중요했지만 성전정화의 사건보다도, 오히려 죽고 부활한 예수의 몸이 성전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는 사실과 아울러, 예수가 참 메시아라는 사실을 매우 강하게 신학적으로 의도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 주제는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에서 또한 이미 예견되었던 것이다.



4. 본문 주석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온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온지라 유월절은 유대인의 모든 명절들 중에서도 가장 큰 절기였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율법은 12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 남자로 예루살렘에서 20마일(약 30km) 이내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여기에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유월절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들 뿐만이 아니었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결코 자기들 선조의 신앙과 땅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땅에 머물러있던지 적어도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한 번 지내는 것이 모든 유대인들의 꿈과 목표였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이 경우 문자 그대로 해석해도 \"올라가신 것이다\"라고 이해가 되는데 사실 그대로 갈릴리 근처의 해발 680피트로부터 해발 2500피트의 고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올라간다\"는 표현이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그쪽으로 여행하는 일에 관한 통상적인 표현이지, 저지에서 고지로 올라가는 뜻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가나의 혼인잔치 후 예수의 일행은 잠깐동안 가버나움으로 내려갔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북쪽 호반에 있었는데 그 자리가 분명하지는 않다. 가나는 가버나움에서 약 30km 거리에 있는 산촌지역이다. 가버나움을 다녀온 예수 일행은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성전숙청 이야기의 환경으로서 유월절을 내세웠는데 이것은 요한의 특징이다. 요한은 유월절과 예수의 고난을 결부시켜서 자주 반영하고 있다(6장 4절;12장 1절;13장 1절 참조).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 언제나 성전을 방문한다는 것은 곧 희생의 제물을 드린다는 의미가 되었다. 많은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에까지 순조로운 여행을 하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감사의 헌물을 드리기를 원했고 인생살이에 있어서 거의 모든 활동들과 사건들은 모두 그것 하나하나의 합당한 제물이 있었다.
그러므로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물을 성전 뜰에서 살 수 있었다는 것은 당연해 보일 뿐 아니라 편리를 제공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제사에 사용되는 동물은 어던 것이든지 완전해야 되고 결점이나 흠이 없는 것이어야 되었다. 성전 당국은 바쳐질 희생의 제물을 심사하기 위해 감독관들을 임명해 두고 있었다. 이 심사비가 두 펜스였다. 만일 어떤 예배자가 제물을 성전 밖에서 사온 것이라 할 때는 그 제물은 심사 받을 때 거부될 것이라는 것은 사실상 거의 확실했다. 거듭 말하는 것이지만 그것 자체는 대단한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상 비둘기 한 쌍이 성전 밖에서는 9펜스의 값 밖에 안 나갈 것이지만 성전 안에서는 15실링이나 되는 비싼 값이었다.
여기에 다시 가난하고 비천한 순례자들을 희생시켜 뺴앗는 철면피한 약탈이 있었다. 이 순례자들은 오직제물을 드리고 싶어 성전 구매소에서 희생물을 구매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하도록 강제 당했던 것이다. 더우기 이것은 순수한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사실로 말미암아 더욱 악화된 허황된 사회 부정이었다.
성전세 19세 이상된 모든 유대인들은 누구나 지불해야 하는 일종의 세금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성전세였다. 성전제물과 성전의식이 매일 매일 수행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이 세금을 지불할 필요가 있었다. 이 세금의 금액은 반 세겔이었다.
금액에 대해서 생각할 때 이 때에 하루 노동자의 임금이 약 8펜스였다는 것을 기억하면 되겠다. 반 세겔이라는 금액은 약 한 실링 두 펜스 가량이 되었다. 그러므로 반 세겔이라는 액수는 거의 이틀 동안 일한 노동임금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일반적인 용도를 위하여 팔레스타인에서는 모든 종류의 화폐가 유효했다. 로마, 헬라, 에굽, 그리고 두루와 시돈, 또 팔레스타인에서 나온 은화들이 모두 유통되고 있었으며 효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 성전세 만은 갈릴리 세겔이나 성전 세겔로 지불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것들이 유대인의 주화였고 성전에 드리는 헌물로 사용될 수 있었다. 다른 화폐들은 이방인들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화폐는 더럽고 불결한 것들이어서 통상적인 부채를 지불하는 데는 사용될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 드릴 헌물로는 절대로 사용될 수가 없었다. 유월절이 되면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전 세계 각처로부터 각종의 화폐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성전 뜰에는 돈바꾸는 자들이 앉아 있었다.
돈바꾸는 사람들 만일 돈바꾸는 자들이 거래가 바르고 정직한 것이기만 했다면 그들은 정직하고도 필요한 목적을 수행하는 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이 행한 것은 부정이었다. 그들이 교환해주는 매 반 세겔 마다 약 두 펜스의 값이 나가는 주화인 한 마하(ma\'ah)를 요구했고 만일 더 큰 주화를 내놓으면 그들이 돌려받는 잔돈 중에서 매 반 세겔 마다 또 다른 한 마하를 요구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만일 어떤 사람이 두 세겔의 가치가 있는 주화를 가지고 왔다면 그는 그것을 교환하는데 지불해야 되고 잔돈 반 세겔에 대해서 두 펜스의 세 배, 육 펜스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돈 바꾸는 자는 그 사람으로부터 하루 노임인 팔 펜스를 받아 내는 셈이 되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쫒으시고 돈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예수가 격노한 것은 유월절에는 순례자들이 매우 무리를 해서 피곤한 상태로 성전에 오는데도 엄청난 액수의 금액을 환전해주는 자들에게 속아서 빼았기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횡포스럽고도 파렴치한 사회적 부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를 빙자하여 자행된 부정이었다. 예수가 불같은 분노를 일으켜 모두다 내어 쫓으시고 쏟으시며 상을 엎으신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공관복음에는 예수의 이 행위의 의미를 이사야 56장 7절과 예레미야 7장 11절의 인용으로 설명하는데 대해서 요한서에는 직접 내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바꾸지 말라는 명령으로 바꾼다. 공관복음서나 요한은 함께 예수의 분노가 참 예배를 가로막는 장애물 때문이란 점은 같으나 공관복음서는 유대교의 우주적인 의미를 인정하고 그 거룩함이 성전 한 가운데서 악한들에 의해 더럽혀졌다는 뜻을 암시한데 대해서 요한은 약간 관점을 바꿈으로써 장사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점에 집중하고 있다. 제자들은 이 일에서 메시아적 시로 알려져 있는 시 69장 9절을 상기하고 있는데 이 구절은 15장 25절, 19장 29절, 사도행전 1장 20절, 로마서 15장 3절 등에 자주 인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시편의 과거사를 미래사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것은 시편의 이 말을 예수에게 올 죽음의 예언으로 바꾸어 놓은 것을 의미한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여기서 유대인이라고 한 것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킨 것이다. 그중에 사두개인은 성전 세금을 관활하는 이들이다. 그들이 예수에게 이러한 행위가 어떤 것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밝혀주기를 요구한다. 공관서에 의하면(막 11:27-28) 그들이 예수에게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할 권세를 주었느냐?\"라고 묻는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세례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는 반문으로 그들의 입을 막을 뿐, 그 대답을 피한다. 이에 대해서 요한복음은 이러한 일을 활 수 있는 증거로서 우리에게 표적, 즉 기적을 보여달라고 한다. 이것은 공인할 만한 사격을 묻는 것이다. 그들은 재판자로서 예수와 마주서고 있으며 예수의 하는 행위가 합법적인지를 기적을 통해서 증거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자주 받은 요청으로서 6장 30절에도 있으며 공관복음서에도 자주 나온다(마가복음 8장 11절;마태복음 12장 38절;누가복음 11장 16절). 이러한 요구는 전형적인 유대적 입장으로서 바울은 그것으로 유대인을 성격화하고 있다(고전 1장 22절). 그러나 그것은 비단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인간 전반의 자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 기적의 이중적인 의미를 모르고 하는 요청이다. 성서의 신앙에서는 사탄도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것으로 돼 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합리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고 봄으로써 확인하려 한 것이다.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여기에서 예수는 그들의 요구를 형식상으로는 거부하지 않는다. 즉 성전의 붕괴와 새 성전의 건설이 그 표적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예수의 인격 자체를 믿지 않고 거기에 덧붙여서 어떤 것을 보아야 믿겠다는 그들의 요구는 거부된 것이다.그런데 이 예수의 대답의 첫 구절은 \"이 성전을 헐라\"(Destory this temple!)는 예언자적 형식의 아이러니적 명령이다(불트만). 이것이 간접적으로 성전의 붕괴가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결과로 올 것이라는 뜻을 나타낸 것이라면 \"내가 그것을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라는 뜻은, 종말적인 구원은 예수 자신이 보냄을 받음으로써 되어지는 종말적인 사건에서 최종적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사건이 곧 새로 세워질 성전이란 뜻이다.
요한은 자주 이중적 의미의 용어를 잘 쓰는데 성전이란 말도 그렇다. 성전은 종교적인 집으로도 쓰지만 \"몸\"이라는 뜻으로도 쓴다(고전 3장 16절;6장 19절). \"헐다\"는 말도 집이나 성전의 파괴라는 뜻과 몸의 사망이라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또 \"일으킨다\"라는 말도 집을 건설한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줄곧 죽음에서의 부활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이러한 표현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성전의 파괴로 이해했을 것이나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이 말이 그의 죽음과 부활의 예언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본래 이 말의 뜻이 그 어느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마가에는(14장 58절) 예수를 고소하는 자들의 말로서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집을 짓겠다고 했으며, 사도행전 7장 48-50절이나 고린도후서 5장 1절에도 마가와 똑같은 예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교의 중심인 성전의 붕괴를 의미하며 일으키는 것은 새로운 종교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요한은 21절에서 보는대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예언으로 이해했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46년동안 지은 성전을 사흘에 짓는다는 불합리한 예수의 말을 그들은 공격한다. \"사흘동안\"이란 숫자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죽음에서 부활의 떄와 일치시켰을 것이다. 이 말의 본래 뜻은 \"잠깐 후에\"였을 것이다. 그런데 46년이라는 숫자는 유대 다른 기록에서는 볼 수 없는 숫자다. 해롯의 성전은 주전 20-19년에 건축이 시작됐다. 그렇다면 주후 27-28년에 완성됐어야 한다. 그러나 주후 64년까지 이 성전은 완성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숫자는 복음기사에 의하여 알려진 초대교회의 전승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21절은 이 복음기자의 주석이다. 이러한 예는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제자들은 예수의 교훈이나 행위를 그의 부활 이후 그 빛을 통해서 해석한 데가 많은데 12장 16절 같은 것은 그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13장 19절, 14장 29절 등에서도 예수에 의해서 그러한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성경\"이라고 한 것은 구약의 특수한 구절을 말하고 있다. 초대 교회에서는 성경과 그리고 예수의 말씀으로 그들의 믿음의 거점을 삼고 있는데 \"성경에\"라는 표현은 20장 9절 또는 고린도전서 15장 3절 등에서 보는데로인데 그들의 구약을 인용하는 입장은 사도행전 2장 24절, 또는 13장 34절 이하에서 엿볼 수 있다. 그들은 구약의 언약과의 관련 안에서 예수의 삶이나 한 일이 메시아로서의 성취라는 입장에서 구약을 인용하고 있는데 시편 16장 10절, 호세아 6장 2절, 레위기 23장 10-11절 등은 예수의 부활의 언약으로 인용한다(고전 15장 4,20절). 요나서 1장 17절 등도 그러한 뜻에서 이해하고 있다(마태복음 12장 40절).
성전숙청을 성전의 몰락에 관한 예언과 연결시킴으로써 유대인의 잘못으로 인해서 파괴된 성전재건의 전주곡으로 그 의미를 변동시키고 있다. 예수 자신은 유대인이 파괴할 성전이며 그는 곧새로 세워질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요한의 종말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즉 종말은 장차 일어날, 기다려야 할 사건이 아니라 예수의 운명에서 이미 일어났다는 것이다. 유대인 자신이 그들의 불신앙의 반항으로 구속사건을 촉진하는 도구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성전을 헐라\"는 명령을 실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에게는 심판을 의미한다.



5. 오늘의 의미



본문에서 보건대, 당시의 불합리한 사회부정과 그에 영합한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혔다. 당시의 성전은 경배의 장소가 아니라 권위의식과 탐심과 부패한 유대의 어두운 표상이었다. 하나님의 성전은 인간의 탐심에 의하여 위협을 당하였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비교적 명확하다. 예수님은 격노하셨고, 모두 다 내어 쫓으시고 상을 엎으셨다.
그렇다면 오늘에 있어서 성전정화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오늘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전은 우리의 세계(世界)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통치의 왕국에 대한 침탈의 전쟁은 오늘도 여전히 현존한다.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침탈은 오늘에 있어서는 더욱 은밀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현실은 신앙과 불신앙, 정의와 불의, 하나님의 권세와 악마의 권세의 경계선을 명확히 가려내는 일이야말로 지극히 어렵다. 하나님의 성전은 오늘도 은밀히 침탈당한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이 몸소 행하셨던 거짓과 불의에 대한 단호한 저항과 성전을 수호하려는 메시아적 열망을 본받아야 하겠다. 예수님과 같은, 부정에 대한 저항만이 성전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가 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 자신 자신이 이 현실 안에서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통치의 왕국을 확장해 나가는데 헌신적인 노력을 감행해야 하겠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그 성전의 확장을 위해 우리를 부르시고 결단을 촉구하신다.



참고문헌

1.한글판 개역성서. 서울: 대한성서공회, 1962.
2.안병무외 지음. 신약성서개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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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C.K. 바레트(한국신학연구소 역). 요한복음 I - 국제성서주석 32-1.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84.
5.Derek Williams(이정석 외 역). IVP 성경사전.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2.
6.Leon Morries(이상훈 역). 요한복음 上 - 성경주석 뉴 인터네셔널 7.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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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Kosin52/436L/15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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