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
1장 바울은 어떤사람이었을까?
“대머리와 휜 다리에 눈썹은 서로 맞닿고 메부리코에 단신의 다부진 체구를 가진 호감에 찬 사나이” 헬라도시인 데살로니가에서 살던 유대인들은 바울을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자’(행17:6)로서 그들의 회당까지 뒤엎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바울의 자기고백은
“나는 유대인입니다.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으로서 유대인의 철저한 생활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나는 로마 시민권이 부여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을 특권으로 여깁니다. 나는 유명한 스승,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바리새인들이 다져둔 우리 조상들의 엄한 율법의 교훈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율법을 거의 흠 없이 순종하였다고까지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갈1:13~14 빌3:5~6)
1) 바울의 유년기
바울의 일생을 두 개의 기간으로 뚜렷이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다소에서 보낸 유년기와 둘째 예루살렘에서 보낸 청장년기이다. 행22:3절에서 ‘자랐다’는 표현은 바울이 어린아이 였을 때 다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왔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구절이 다만 교육에 대한 언급이라고 본다. 바울이 크리스찬이 된 이후에 다소로 되돌아간 점으로 미루어 그렇게 보는 것이 타당하다(행9:30)
무엇보다도 바울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또한 자신이 대학도시이며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인 다소출신임을 자부하였다.
하지만 그는 다소의 헬라적이고 이방적인 문화는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바울의 양친은 로마 시민임과 동시에 훌륭한 유대인들이었다. 부모는
바울이 아직 소년 이었을때 다소와 같은 도시의 이교문화에 물들지 않도록 힘썼지만 총명한 아이들치고 헬라의 이방문화에 담긴 언어나 사상을
흡수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이기간은 도시의 보편적인 영향은 바울의 서신과 설교에서 헬라문 학이 두 번씩(행17:28, 딛1:12) 인용된 점을
보아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즉 에피메니데스와 아라투스시인에 대한 언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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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소는 길리기아의 옛 수도로 이 지방의 동쪽, 비옥한 지대인 ‘길리기아 페디아스’의 주요도시이다. 다소는 터키의 남쪽, 소아시아의 남동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길리기아 관구 내에 있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이며 길리기아의 주요도시로 다소강과 지중해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터키의 남부 도시이며, 지중해로부터 약 19km 정도 북쪽에 떨어져 있다.
다소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선 B.C. 3000경으로 올라가야 한다. 선사시대의 신석기시대로 소급되어지는데, B.C. 3000경에 다소는 이미 요새화된 성읍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소의 초기 역사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B.C. 400경에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점령했다가(B.C. 401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이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사라졌는데, 그때 당시 크세노폰이 쓴 원정기에 다소가 언급된다.) 그 뒤에 알렉산더 대왕이 지배했다.
알렉산더 이후에는 시리아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B.C. 200경에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여기에 와서 살게 되었고 그 중에는 사도 바울의 조상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B.C. 104에는 로마가 다소지역에 침투하였고, 따라서 다소는 B.C. 65에 폼페이우스가 지중해 동쪽 끝의 모든 민족들을 정복함에 따라 로마의 관할 지역이 되었다. B.C. 50경, 다소가 로마제국에 속하게 되면서 시세로가 총독으로 있을 때, 가이사 아구스도가 이 도시를 방문했다고 전해진다. B.C. 41에는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가 조공을 받기 위해 다소에 있었는데, 이 때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만나러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 문’을 세웠다. 그 문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A.D. 641에 아랍이 침입하여 이 도시를 파괴했으며, 1086에는 셀주크 투르크인들이 점령하여 1097년 십자군들이 여기에 들어올 때까지 이 도시를 지배했고, 결국 다소는 16C에 오스만 투르크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은 터키의 한 도시 ‘테르수수’라고 불려지고 있다. 현재, 아다나 공항에서 왼쪽으로 40km떨어진 곳에 다소가 있으며, 인구는 8만 정도 된다. 길리기아 평원의 비옥함은 다소에 부를 가져다주었으며, 특산물은 직조와 천막 제조업이다(바울도 천막을 제조하는 직업적인 기술을 가졌으며 전도 활동 중 생활수단으로 이 기술을 사용했었다.).
다소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중앙 소아시아 사이에 무역을 하는 중요한 상업 지역이며 옥수수, 면, 양모, 가죽 등의 수출로 유명하다.
주전 334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길리기아를 통해 페르시아 정복을 하였고, 이로 인해 다소는 동, 서양 문화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다.
사도 바울 시대에는 다소가 대학도시로서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할 정도였다고 하니 헬라 철학과 문화가 활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길리기아의 중요한 도시로 여겨졌던 다소는 아덴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처럼 학문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다소는 사도 바울의 출생지로 사도행전에만 5회 언급되었다(행 9:11, 11:25, 21:39, 22:3 등)
2) 바울과학문
바울이 아직 어렸을때 그의 양친은 바울을 공부시켜 장차 유대교의 율법교사가 되게 해야겠다고 작정하였다. 어린 소년 시절부터 바울은 다소의 동네 회당에서 정기적인 교육을 받으며 유대인들의 전통을 익혔다. 소년바울이 처음 손에 잡은 구약성경은 아마 헬라어로 된 70인역 이었을 것이다. 이 구약본은 B.C 15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대인 학자들이 히브리 원전에서 번역한 것이다. 이 번역판을 LXX 즉 70이라는 로마 숫자로 적고 70인역이라고 부른다. 번역자가 70명이었다는 전통 때문이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밖에서 살던 유대인들은 거의가 히브리 성경보다 오히려 헬라어로 된 70인역을 애용하였다.
바울은 다소에 살면서 텐트 제조법도 유대 율법을 배우는 학생들은 누구나 학과목 이외에도 상업에 필요한 기술 하나씩을 익혀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울이 나중에 선교사역을 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꾸려 나갈 때에 큰 도움을 주었다.
바울은 다소에서 유대 세계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으로 옮겨갔다. 거기서 그는 학식이 깊은 랍비 가말리엘의 제자가 되었다. 가말리엘은 위대한 스승 힐렐의 손자였다. 힐렐은 그의 라이벌인 샴마이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형태의 유대주의를 가르쳤다. 이혼에대한 예수님의 말씀(막10:1~12) 이 두랍비들의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의 결과일지 모른다. 힐렐은 아내가 남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경우라면 비록 밥을 태운 일이라도 이혼 당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한편 삼마이는 이혼이 어떤 심각한 도덕적 죄를 범했을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견해를 견지하였다.(고전7:10~11) 이 주제에 대하여 바울이 나중에 쓴글을 보면 그가 크리스챤이 된 이후에 이혼관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힐렐학파의 전통에서 적어도 한가지 큰 교훈을 얻었다. 샴마이는 하나님의 목적 속에는 이방인들의 자리가 전무하다고 보았다. 반면에 그의 라이벌인 힐렐은 이방인들을 환영하고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전도하였다. 바울이 처음으로 로마제국의 비유대인들을 위하여 얼마나 큰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가말리엘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학문을 잘 쌓아 곧 권위있는 자리에 올랐다. 실고 그는 크리스챤들의 신앙문제에 도전하여 그들을 심문할 만큼 당당한 위치에 있었다. 그는 공회나 혹은 산헤드린 유대인최고 공의회에서 크리스챤들에게 부표를 던질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행26:10)
바울의 배경과 교육에 대해 간략하게 밝혔다. 이제 더깊이 들어가서 바울의 초기 생애에서 무엇을 더찾아볼 수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바울의 복합적 개성과 그의 어두운 측면의 서신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젊은 바울의 마음에 영향을 끼쳤던 세 종류의 사상들을 우선 들을수 있다. 즉 첫째 유대교, 둘째 헬라철학, 셋째 신비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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