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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순교한토마스선교사

기쁨조미료25 2008. 1. 26. 22:24
대원군이 집정하여 쇄국정책을 펴고 있는 동안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한 끝에 이 땅에서 처형된 영국 선교사가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사에서 ‘첫 순교’의 영광된 자리를 차지하게 된 토마스 선교사가 그 분이다.
토마스 선교사는 영국 하노버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런던선교회 파송으로 중국 상해로 오게 되었다. 그의 선교사의 길은 처음부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그의 아내 케럴라인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망한데다가 런던 선교회의 상해 주재 책임자인 무어헤드와의 불화가 겹치게 되었다.
토마스는 런던 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하고 해관에서 근무하면서 선교사역을 계속하였지만 선교회의 반응은 경멸과 적의 그리고 불신뿐이었다. 그러다 그는 스코트렌드 성서공회 윌리암슨 선교사를 만나게 되면서 지푸에서 윌리암슨 선교사의 일을 도우며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지푸에서 만나게 되면서였다. 그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배우면서 바로 한국선교여행을 계획하였다. 드디어 1865년 9월 13일 그는 한국에 도착하였다. 2개월 반 동안 한국 해안가에 머물면서 가지고 간 중국 성경을 나누어주고 복음을 전하는 등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벌였다. 그 후 서울을 향해 떠났지만 태풍으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만주를 거쳐 북경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오직 조선에 가있었다. 그의 한국말과 조선에 대한 지식이 알려 지면서 프랑스 함대가 그를 통역관으로 쓰려고 하였다. 당시 프랑스 함대는 조선에서 프랑스 신부에 대한 학살을 구실로 조선에 들어가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함대는 인도지나해 방면의 긴급사태에 투입되면서 토마스의 한국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다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향해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에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통역관으로 이 배에 편승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토마스 선교사가 꿈에 그리던 조선 땅에 도착하였다. 1866년 8월 16일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것이다.
평양에 가까워지면서 제너렬 셔먼호와 한국 측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런 긴장 속에 제너럴 셔먼호의 발포사건과 이현익의 억류사건이 일어나자 조선군의 반감을 사면서 사태는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긴장의 분위기 속에서 며칠 더 버틴 제너럴 셔먼호가 모래톱에 좌초되면서 조선의 화공이 전개되었고 배에 머무르고 있던 토마스 일행은 뭍에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분격한 군민들에 의해 결박되고 타살되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1866년 9월 2일 토마스 선교사는 27세의 나이로 아직도 수많은 교회가 그의 죽음위에 세워졌던 평양의 대동강 가에서 피를 흘렸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복음의 말씀을 이 땅에 전하려 하였다. 이때 토마스에게서 한문 성경을 받았던 한 사람이 뒷날 선교사 마펫을 찾았고 전도자가 되었다.
그의 순교는 헛되이 끝나지 않았다. 제너럴 셔먼호가 미국 상선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 배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조선을 설득하여 결국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각 미국 교단의 선교사 파견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 는 터툴리언의 말대로 한국을 위해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그의 순교이후 16년이 지나면서 한국의 쇄국정책은 끝나게 되었으며 19년이 지나면서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된것이다.

 

 

 

 

하노버교회

 

로버트 토마스선교사

 

교회 벽의 토마스선교사 사진과 기념석판

 

토마스 선교사, 한국100주년 순교자기념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장면 (평양대동강변)  블로그명 : ━☆Jesus is praying for you☆━

 

토마스선교사 무덤, 1866 병인교난시 순교

 

한국 토마스기념교회 (대동강변), 한국기독교 역사박물관 소장그림

 

한국교회는 토머스의 순교를 기려 1926년 순교 60년 기념회를 조직, 1927년 5월8일 그의 순교지에서 1천여명이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으며 1928년에는 오문환목사의 집필로 전기가 나왔고 1933년 9월14일에는 대동강변에 토머스기념 예배당이 세워졌다

 

2006년 출간

 

 

 

영국 하노버교회  ‘한국인 사랑’ 순교자 토마스 교회  


순교자의 피는 복음의 토양이다. 세계 교회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거니와 이 땅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에 개신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84년.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의해서다. 이보다 18년 앞선 1866년 영국인 선교사 로버트 토머스(Robert Jermain Thomas·1839∼1866) 목사가 대동강변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토머스를 키워낸 교회가 영국 웨일스 지방에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필자는 18세기 영국을 변화시킨 존 웨슬리의 영성현장을 답사한 뒤 런던에서 5시간 가까이 달려 웨일스 남부지방 하노버에 도착했다. 19세기 중엽 영적 미개지였던 ‘동방의 작은 땅’에 와서 최초로 순교의 피를 흘린 토머스 선교사가 신앙생활을 한 하노버 교회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노버는 웨일스 남부의 목가적인 서정을 간직한 조용한 마을이었다. 하노버 교회는 그러한 분위기에 걸맞게 작고 검소했다. ‘이처럼 한적한 마을의 작은 교회에서 순교자가 나오다니…’ 하는 의아심과 감회어린 마음으로 회중석에 앉아 한동안 묵상했다. 150여명 남짓 앉을 수 있는 크기의 예배실 벽에는 토머스 선교사의 사진과 함께 그의 죽음을 기리는 기념석판이 장식돼 있었고 그가 남긴 유품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특히 1990년대초 한국인으로는 처음 이곳을 찾아 박사학위 논문을 쓴 예장통합 기독공보 사장 고무송 목사의 논문집 등이 보존돼 있어 반갑고 놀라웠다.  토머스는 1839년 웨일스 북부 라드노주 라야더에서 태어나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웨일스 남부지방 하노버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로버트 토머스 목사(1810∼84)는 이곳에서 36년간 목회했으며 그는 지금 교회 정원에 잠들어 있다. 토머스 선교사는 하노버에서 고교를 마친 후 잠시 초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857년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러나 건강문제와 지방교회 전도 활동 등으로 1863년 늦게서야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께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은 토머스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선교사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자 지체하지 않고 해외선교를 지원했다. 런던선교회로부터 중국선교사로 임명된 토머스 선교사는 1863년 6월4일 아버지가 시무하는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는다. 목사 안수와 함께 중국으로 떠나기 위해 고드페리와 결혼을 하고 7월21일 중국 상하이(上海)로 출발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선교지에서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돼 실의와 충격을 견디지 못한 토머스 선교사는 런던선교회에 사표를 제출,청나라 해상세관의 통역관으로 일하게 된다. 그러나 토머스는 선교 사명을 포기한 자신의 행동에 늘 괴로워하다가 세상 직업을 청산하고 다시 선교활동에 발벗고 나섰다. ‘사명길’과 ‘세상길’의 갈림길에서 동요할 때 그를 붙잡아준 인물이 당시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윌리엄슨 선교사였다고 한다. 토머스 선교사는 이 무렵 한국 천주교인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윌리엄슨과 협력하여 한국 선교의 꿈을 갖게 되었다. 1865년 윌리엄슨으로부터 물려받은 상당량의 한문성경을 가지고 황해도 자라리 해안에 도착,2개월반 동안 선교활동을 벌리면서 한국어를 익히기 시작한다. 한양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으나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만주를 거쳐 베이징(北京)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베이징에서 잠시 중서학원(Angro-Chinese College) 원장직을 맡고 런던선교회에 복직하는 등 한순간도 한국 선교에의 꿈을 포기하지 못했다.  토머스 선교사는 다시 조선땅으로 들어가려 노력하던 중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교역차 조선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1866년 8월9일 이 배에 승선하게 된다. 제너럴 셔먼호는 서해안에서 대동강을 거슬러올라 가다가 평양 인근에 정박했다. 선원들은 조선 관리의 저지와 경고를 무시한 채 상거래를 요구하면서 대포를 쏘는 등 난폭한 행동과 살상으로 조선 당국의 분노를 샀다. 그 결과 조선군의 공격을 받아 1866년 9월5일 제너럴 셔먼호는 불타게 된다. 이런 경황 속에서도 토머스는 선두에 서서 성경을 들고 전도하다가 조선군의 칼에 순교의 피를 흘렸으니 그의 나이 26세였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사력을 다해 강가로 성경을 던지며 “하나님,지금 죽어도 좋습니다. 단 한 권이라도 조선인에게 성경을 전하게 해주십시오!”라고 외쳤다고 한다. 토머스를 체포하여 처단한 사람은 박춘권이란 자인데 토머스는 그 순간에도 가슴에 품고 있던 성경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토머스로부터 성경을 받은 박춘권은 훗날 평양교회 장로가 되었으니 살아있는 말씀의 역사며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땅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함께 복음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로부터 18년 후 1884년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손에는 이미 한글로 된 성경이 들려 있었다고 한다. 살아있는 말씀만이 죄인을 변화시키고 국가와 민족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한국 초기 교회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영적 위기의 시대에 한국 교회는 ‘성서 한국’을 이룩하기 위해 말씀으로 더욱 무장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하노버 교회에서 발견한 중요한 사실을 여기 소개한다. 하노버교회 정원 건너편에는 낡은 건물이 하나 서 있는데 그것이 1774년 지어진 최초의 교회 건물이라고 한다. 토머스 선교사가 유년 교회학교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건물이라고 한다. 교회 관리인 낸시 윌슨 여사의 설명으로는 교회 재정이 어려워 이 최초의 교회 건물을 ‘매물’로 내놓았단다. 이 사실을 알고 필자는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던 토머스 선교사의 영성이 살아있는 역사적인 하노버 교회 최초 건물이 일반인에게 팔려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성영(성결대 총장·시인)   [국민일보 200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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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선교사!

토마스(Thoma,Robert Jermain,1840,9-1866,9,50 선교사는
영국 런던선교회 소속 한국 개신교 최초 선교사로 한국에 선교를 순교로 그리스도를 개척한 사람이다.

영국 웨일즈 라드노루에서 출생하여 런던 뉴 칼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 선교에 뜻을 품고는 중국 선교를 지원하여 중국 선교사로 임명받아 목사가 되었고,
1863년7월 21일 중국에 도착 상해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으나 부인이 풍토병으로 죽고 지원하는 선교부와의 불화로 고민하다가 선교를 잠시 포기하고 청국 세관에 취업하여 근무하던 중에 다시 부름 받았던 선교사에 꿈을 버릴 수 없어 한국 선교를 위하여

1965년9월에 1차로 한국에 서해안과 섬(백령도, 등)을 방문하고, 1966년7월에 미국 상선 제너널 샤만호(General Sherman)에 통역관에 자격으로 동승하여 대동강으로 한국에 입국하였다.

샤만호에는 비단, 자명종, 유리그릇, 천리경 등, 근대 과학의 물품을 싫고 와 쌀, 사금, 홍삼, 호피, 등 토산품과 통상을 하자고 준비해온 음료수와 비상 식량을 제공한 미국의 제너널 샤만호의 제의를 거부한 평양감사 박규수는 정부의 쇄국정책에 따라 서양과는 통상을 하지 않으니 되돌아가라는 명령을 하달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샤만 호에서 통상을 위하여 시위하던 중에 대동강물에 조수 간만의 차이를 모르고 순행 하다가 간조 시 물이 빠르게 바다로 흘러가므로 인하여 샤만호는 대동강 강변에 가치게 되어 우리 나라에 관군과 전투를 한 결과

우리측 군관 7명이 사망하고 5명이 중상을 당하였으며 승선한 승무원 23명 전원이 죽고 샤만호는 불태워 지는 불운 속에서 토마스 선교사는 순교의 최후에 순간에도 한문 성경을 우리 나라 관군에게 전해주며 순교하는 영광에 순간을 맞이 하였다.

한문 성경을 받아든 군관 중에서도 한문 성경을 몰래 숨겨 집으로 가져다가 벽지를 하기도 하고 잘 보관한 군관에 집인 서씨 가정에서 한문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데 참여하는 문서 선교사가 배출되어 한글 성경을 태동하는데 큰공을 세웠으며,

서씨의(서상륜, 서경조,등) 가족들이 황해도 장연에 최초의 한국인이 세운 교회인 역사적인 소래 교회를 1884년에 세우게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는 헛되어지지 않고 그 후에 대동강변에 순교 기념관이 세워졌고 동양의 에루살렘 이라고 하는 평양에서 복음에 밀알이 되어, 언더우드 및 아펜젤러 선교사들이 선교 지원과 함께 다녀간 후에, 선교사 마펫(S.A.Moffett, 마포삼열)에 의하여 1894년에 장대현 교회가 세워지고,

1901년에는 목회자를 배출하는 평양 신학교가 세워지므로 최초의 한국인 7인(길선주, 이기풍, 등) 목사를 배출하고는 홀(Hall) 및 여러 의료 선교사와 복음 선교사들과 함께 복음에 씨앗이 퍼지게 되었고, 1905-1907년에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된 새벽 기도회와 회개운동이 일어나므로 한국교회의 부흥에 물결이 시작 된 곳이다.

길선주 목사에 뒤를 이어 부흥사가 된 유명한 평양 신학교 3회 졸업생인 김익두 목사는 선교사를 죽기기 위하여 시도했던 자 이였지만 1900년에 그리스도 인이 되고 스왈른(W.L.Swallon)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전도자가 되어, 한국에 사도 바울로 신유에 이적과 기적을 행하며 전국을 순회하는 부흥사로 쓰임을 받다가 공산당에게 순교하였다.

장대현 교회의 시작으로 남문밖, 내리, 창동, 산정현, 서문밖, 남산현, 선교리, 칠산, 채관리, 중앙, 건지리, 박구리, 역포, 신양리, 유정 ,두로도교회, 등이 세워졌고,

1923년에 평양 여자 신학교가 세워져 영어, 음악, 성경 등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배출하였고, 숭의여교, 숭인학교, 숭실학교, 숭실 전문학교, 정의학교, 광성학교, 오산학교, 등이 세워져 교육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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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지금 세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순교하는 신앙이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복음전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복음을 듣고 영접하고 구원에 감사하는 영혼들을 볼 때 저는 선교사로 부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순교하는 신앙으로 세계곳곳에 나아가 복음전할 사람들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학교를 찾아 온 선교사의 말을 듣던 토마스의 마음은 선교의 열정에 사로잡혔다.

"주님, 지금까지는 제가 웨일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제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제 길을 열어주세요."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었다. 그리고 그는 곧 바로 런던선교회를 찾아가 중국선교사로 파송해 줄 것을 신청하였다. 1863년 5월 "토마스씨, 런던선교회는 당신을 중국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연락을 받았을 때, 토마스는 중국선교사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격하며 찬양을 드렸다.

"캐롤라인 드디어 내가 중국선교사로 파송받게 되었소! 우리가 함께 가는 것이오."

그는 약혼자인 캐롤라인에게 달려가 이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선교사로 떠나야 하는 토마스는 캐롤라인과 결혼한 후 곧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드디어 토마스 부부는 1863년 7월 21일 그래이부센드 부두에서 출발하는 폴메이스호를 타고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중국에 도착한 토마스부부의 선교활동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여보, 맛이 없더라도 건강을 생각해서 좀 먹어봐요"

남편인 토마스의 염려하는 말에 임신하여 입덧에 시달리던 캐롤라인은

"입맛이 없어서 음식이 먹히지가 않네요."라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설상가상으로 토마스는 런던선교회의 선임선교사인 무어헤드와의 불화로 사역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토마스 부부는

"주님, 저희들에게 이곳 중국에서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주심으로 위로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주어진 중국에서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옵소서."하고 기도하며 서로를 위로하였다.

그렇게 중국사역을 진행하던 토마스는 1864년 3월에 임신한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한구라는 곳으로 출장을 떠났다. 그런데 토마스의 이웃에 살며 친하게 지내던 미국선교사 부인이 갑자기 풍토병으로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것을 곁에서 본 캐롤라인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런 연유로 캐롤라인은 남편이 없는 가운데 혼자서 태중의 아기가 유산되는 고통을 겪었다. 출장을 떠났던 토마스는 모든 일을 마치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태중에 있을 아기를 생각하며 빠른 걸음을 재촉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여보, 내가 돌아왔소. 떠나 있는 동안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소."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순간 토마스는 섬짓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면서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급한 마음으로

"캐롤라인! 캐롤라인! 아니 어떻게 된 거야! 당신 자고 있는거요?"

이렇게 말을 하며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 토마스는

"아- 악"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캐롤라인이 누워있는 곳에는 핏자국이 여기저기에 뒤엉켜 있었다. 그의 아내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캐롤라인 내가 왔소! 눈을 떠 봐요 내가 왔단 말이오."

그러나 싸늘한 몸으로 누워있는 그의 아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캐롤라인은 아기가 유산된 후에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가운데 이미 일주일 전에 혼자 죽어간 것이었다. 아내의 죽음으로 토마스가 받은 충격은 너무도 컸다. 그 고통으로 인하여 그는 선교에 대한 회의에 빠져갔다. 마치 미친 사람의 모습과도 흡사했다.

"캐롤라인! 나를 두고 당신 혼자서 가면 어떻게 하오. 하나님 캐롤라인은 우리의 사랑스런 아기를 유산시키고 혼자서 죽어갔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까? 내가 여기에 왜 왔는데요. 중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고향과 부모를

떠나 이곳까지 왔는데. 당신이 내게 한다는 것이 고작 이것입니까? 내 아내와 자식을 데려가는 것이 당신의 뜻이냐구요. 저와 캐롤라인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선교사로 키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려면 차라리 저도 데려가지 왜 저 혼자만 이렇게 남겨두셨습니까?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계시지만 말고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하나님 당신은 사랑이시라고 했잖아요. 정말 당신이 사랑이신 분이 맞아요? 그런 분이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거예요. 나를 선교사로 부르신 것인지 이제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토마스는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많은 날을 헤매어 보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의 분노와 원망은 가라앉지 않았다. 토마스는 런던선교회에 편지를 썼다.

"처음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달 24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겠습니다."

괴로움을 견디다 못한 그는 런던선교회에 선교사 사직서를 제출하고 중국 해상세관에 통역으로 취직하였다. 세관에 취직한 그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하여 일하는 것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에 토마스는 우연한 기회에 조선인 '동지사' 즉, 조선시대에 동지를 전후하여 중국에 공물을 갖고 보내던 사신 일행을 만나서 조선 내에서의 카톨릭교도들에 관한 수난을 듣게 되었다. 동지사로부터 카톨릭교도들이 참수당하는 소식을 듣게 된 토마스의 마음에는 또 다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뜨거워졌다. 그리고 조선에서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며, 순교의 피를 흘리고 있다는 동지사의 말이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이제부터 나의 선교지는 조선이다. 죽어가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어! "

토마스의 마음은 조선에 대한 선교열정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한 생각으로 마음을 불태우고 있을 때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윌리암슨 선교사가 그를 찾아왔다.

"토마스, 계속하여 세관에서 통역하는 일만 할 생각이오?

당신이 아내를 잃은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내를 잃은 아픔을 떨쳐버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당신은 중국어와 러시아어, 몽골어 등의 언어에

능통한데 하나님께서 왜 당신에게 이러한 언어의 재능을 주셨을 것 같소. 복음전하는 것에 사용하도록 함이 아니겠소."

"그렇지 않아도 세관에 사표를 내려던 참입니다.

저는 그동안 제 믿음이 좋아서 이곳 중국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된 줄 알았는데, 캐롤라인의 죽음앞에서 사정없이 흔들리는 제 약한 모습을 보면서 제가 참으로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교는 자식을 무덤에 묻는 아픔 없이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셨던 분들의 이야기가

이제 실감이 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잠시도 제 스스로 설 수 없는 자란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토마스의 모습은 조용하지만 복음전하기 위해 준비된 결연한 모습이 보였다.

"윌리암슨, 사실은 얼마 전에 조선의 동지사를 만나 그곳 소식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지금 조선에는 많은 카톨릭신자들이 예수를 믿는 것으로 죽음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오작통이라고 하여 한 가족이 예수를 믿으면 다섯가족이 죽음을 당하는 등의 핍박을 당하고 있답니다. 이 말을 듣고 난 후부터 제 마음은 어떻게 하면 제가 조선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답니다. 저는 중국에 복음전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제가 조선에 복음전하길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럼 내 당장 조선에서 나를 찾아온 두 사람을 만나게 해 드리지요."

윌리암슨의 말에 토마스의 마음은 설레이기 시작했다. 윌리암슨의 안내를 받으며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자 두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이 분은 토마스목사입니다. 인사하시지요."

윌리암슨의 말을 들은 두 젊은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저는 김좌평입니다.저는 최선일입니다." 하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토마스목사입니다. 저는 조선에 가서 야소(예수)교를 전하려고 합니다." 라고 말했다. 조선에 가서 야소교를 전하겠다는 토마스의 말에 놀란 두 젊은이는

"예-예-- 안됩니다. 조선은 지금 박해가 심해서 야소를 믿던 우리도 목숨을 걸고 피해 왔습니다. 조선에 있다간 칼날에 맞아 죽습니다."

화들짝 놀라며 소리치는 젊은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토마스목사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칼날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순교당하는 겁니다. 그러니 나와 함께 다시 조선으로 갑시다."하는 말에

"글쎄 돌아간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라니까요." 두 젊은이는 손을 내저으며 만류하였다.

"그건 다시 사는 겁니다. 거듭나는 거지요."

젊은이들은 토마스목사의 말을 알아듣기 어렵다는 듯 어안이 벙벙하였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하고 토마스목사가 말을 꺼내자

"마태복음--?"하면서 젊은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성경을 안가지고 계십니까?"

"없습니다.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성경책과 교리문답을 갖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성경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두 젊은이가 합창하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성경책을요? 저를 조선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제가 그들에게 성경책을 갖다 주겠습니다."

결국 두 젊은이는 토마스목사의 말에 감동을 받아 조선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였고 윌리암슨목사는 토마스목사에게 다량의 한문성경을 공급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1865년 9월 4일에 토마스목사는 두 젊은이와 함께 다량의 한문성경을 실은 목선을 타고 제1차 한국방문길에 올랐다. 중국의 지포를 출발한 그들은 10일 만에 황해도 창린도 자자리 군포에 도착하였다. 바닷가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사람을 본 토마스는

"안녕하세요. 저는 야소교 목사입니다. 이 책은 야소교 책입니다. 받으세요" 외치면서 그들에게 성경을 내밀었다.

"에그머니나, 이상하게 생긴 코쟁이가 어떻게 우리말을 하지?"

주민들은 토마스목사가 건네주는 성경책을 받아들었다. 토마스 목사는 백령도 부근의 섬을 2개월 반 동안 돌면서 섬주민들에게 성경책을 주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임을 가르쳤다. 토마스목사는 동시에 섬주민들에게 많은 조선말을 배웠다. 토마스목사가 돌아간 후 관가에서는 성경책이 법으로 금하는 천주학쟁이들의 책이라고 하여 백령도 참사로 하여금 주민들에게 성경책을 회수하도록 하였는데 그때 거두어 들인 책이 99권이나 되었다. 토마스목사 일행은 서울로 가서 전도할 생각으로 범선을 타고 한강을 향하였으나 난데없는 폭풍으로 접근치 못하고 표류하다가 북경으로 되돌아왔다. 이 일로 1866년 4월까지 북경에 체재하던 토마스목사는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나 친숙한 교제를 나누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동지사인 평양감사 박규수대감을 만나

"저는 야소교목사 토마스입니다."

"오-오 어떻게 조선말을 잘 하시오? 놀랍소이다."

"작년에 조선에 가서 배웠습니다."

"난 박규수라 하오."

"지난 번에 조선에 가서 천주교 박해가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들었습니까? 지금은 그렇게 심하지는 않소이다."

"저는 또 조선에 갈 생각입니다."

"조선이 그렇게 좋더이까?"

"저는 조선에 가서 야소를 전할 생각만 하면 가슴이 마구 뜁니다. 대감에게 제가 이 책을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소이다."

토마스목사가 박규수대감에게 선물한 책은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이었다. 그가 조선동지사인 박규수대감을 만나고 나올 때 누군가 따라나와 작은 종이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토마스목사가 묻는 말에 대답을 못하고 주춤거리던 그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달아나듯이 뛰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받은 종이쪽지를 읽던 토마스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종이쪽지를 들고 있던 토마스목사의 두 손이 가슴에 모아졌다. 그곳에는 "백령도에서 뿌렸던 야소교 책을 꼭 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 후로 조선선교에 대한 그의 가슴은 더욱 뜨거워졌고 어떻게든지 조선에 갈 방법을 찾아 나셨다. 그때 조선에는 천주교인들이 핍박을 당하여 강산이 피로 얼룩지고 있었다.




그 사건의 발단은 러시아 군함이 원산에 들어와 통상압력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이러한 압력에 대처할 능력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때 천주교도였던 승지 남종상 이 대원군을 찾아가 한가지 방도를 제안하였다. 러시아를 격퇴시키려면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것은 프랑스 신부의 도움이 있으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신부의 도움을 받으려면 천주교를 인정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러시아 함대만 격퇴시키면 천주교의 포교를 인정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유림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것으로 대원군은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그러던 차에 러시아 함대가 스스로 물러갔다.

그때서야 나라의 위기를 이용하여 포교의 자유를 얻으려 했던 남승상의 속셈을 알게 된 대원군은 분노하여 천주교를 사교로 간주하고 책을 불태우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섯 가구 중 한 가구만 천주교를 믿어도 다섯 가구 모두 처형되는 오작통을 실시하였다. 그뿐 아니라 누구든지 서양인과 만나는 사람을 엄하게 다스렸고, 천주교도를 고발하거나 체포하는 사람들에겐 포상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8,000명의 천주교도들이 처형되고 9명의 프랑스 신부가 처형된 병인년 박해의 발단이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자국인의 신부를 학살한 것을 항의하고 압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프랑스 함대를 조선에 원정을 가도록 하였다. 이때 마침 토마스는 통역으로 동행할 것을 제의받았다. 통역으로 동행할 것을 수락한 토마스는 조선에 가져갈 성경과 전도지를 준비하여 소식이 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토마스목사 뭘 그리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소."

"윌리암슨목사님, 왜 프랑스에서 연락이 오지 않는 거죠?"

"프랑스 배는 오지 않는답니다. 프랑스의 식민지인 반도지나에 변란이 일어나서 그곳으로 뱃머리를 돌렸다고 합니다. 대신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무역을 위해 조선으로 간답니다. 그 배에 통역관으로 승선하여 합류하는 것이 어떻소?"

"오! 그것 잘되었습니다. 지금 그 선장을 만나보면 안될까요?"

"성미도 급하십니다. 마침 지금 그곳으로 가는 길이랍니다. 같이 가봅시다."

"선장님 이 분은 조선말을 잘하시는 토마스목사입니다."

"안녕하시오. 우리는 한양으로 가서 무역을 할 계획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평양으로 가는 것이 어떨까요? 평양감사가 저와 친분이 있어서 도와준다고 약속했는데요. 아직까지 조선과 무역을 시작한 나라가 없는데 누군가 도와준다면 통상을 시작하는데 도움이 될겁니다."

"글쎄, 그럼 평양으로 가도록 합시다."

1866년 8월 9일 토마스목사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목적지인 평양에 가기 위하여 대동강을 출발하였고 제2차 조선선교여행에 오른 토마스목사는 이번 조선여행에서 선교를 잘 감당하기 위하여 뱃머리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셔어먼호가 조선국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8월 21일에 포리에 다다랐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 배는 미국배로 조선과 무역을 하려고 왔습니다."

"프랑스 배가 아닌가요?"

주민들은 프랑스배가 아니라는 말에 실망한 듯 하였다.

"하나님께서 조선을 사랑하십니다. 자 이걸 받으세요. 성경책입니다."

"이걸 그냥 받아도 됩니까?"

"여러분들에게 선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 소문이 사람들에게 퍼지자 수 많은 사람들이 배 위에 올라와서 배는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이때 나누어 준 성경이 500여 권이나 되었다.그리고 셔먼호가 북상하여 석호정까지 올라왔을 때 토마스목사는 배의 갑판으로 나와

"야소 (예수)를 믿으세요! 야소를 믿으세요!" 외치면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던져 주었다.

이때 4 일간 머물면서 100여 권의 성경을 주민들에게 주었다. 셔먼호가 석호정에서 만경대까지 다다르자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었다. 조선에서는 그 배가 닿는 곳마다 문정관을 파견하여 목적지와 항해의 목적을 물었다. 통역으로 승선한 토마스는 목적지가 평양이며 통상을 원한다는 것을 밝혔다. 셔어먼호에서는 양식과 땔감을 요구하였고 조선에서는 그것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셔먼호의 미국인 선장은 조선인 이익현을 협상을 하는 것처럼 속여 배로 유인한 다음 그를 억류하였다. 이것을 알게 된 토마스목사는 선장에게

"이러면 안됩니다. 어서 저 사람을 보내주시오."

"당신은 상관마시오. 내가 선장이요."

"정말 조선과 교역을 원하신다면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두고 보시오 저들은 곧 내 말을 듣고 통상을 요구해 올 것이오."

"이건 비겁한 짓입니다. 빨리 저 사람을 보내고 저들에게 잘못을 사과하시오"

그러나 선장은 토마스목사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익현의 억류로 화가 난 조선의 군사들은 소극적이던 자세를 버리고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틈에 박춘권이라는 부교가 이익현을 셔먼호에서 구출하였다. 대포로 공격을 하던 셔어먼호 선장은 조선군사들의 공격이 거세지자 퇴각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홍수로 불어났던 물이 줄어들어 배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배는 모래에 좌초되었다. 이 순간을 놓칠리 없던 조선의 군사들은 일제히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순간에 토마스 목사는

"야소" "야소 믿으시오!" "야소!" 소리치며 배 안에 있던 성경을 군사들에게 던졌다.

"잠깐, 항복하겠으니 우리를 돌려 보내주시오." 배 안에 있던 선장이 외쳤다.

"항복하면 돌려보내주겠오. 잠깐만 기다리시오." 하는 소리와 함께 대포는 조선의 군사들을 향해 발사되었다. 선장의 비열한 처사에 화가 난 조선의 군사들이 일제히 횃불을 싣고 셔먼호에 접근하여 불화살을 쏘아대었다. 배에 떨어진 불화살로 셔어먼호는 불타기 시작했다. 배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강으로 뛰어내렸고 목숨을 건져 뭍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성난 조선의 군사들에 의하여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대동강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배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와중에서도 누군가 한손에 백기를 들고는

"야소, 야소" 외치면서 성경책을 던졌다.

"야 저러다가 저 사람 불타 죽겠다. 야소교 목사라고 했던 사람이지 않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말하였다. 그의 옷에서도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순간 두 팔을 높이 든 토마스는 "야소!" 큰 소리로 외치더니 강물에 뛰어내렸다. 헤엄을 쳐서 뭍으로 나온 그를 목베이려고 누군가 칼을 쳐 들었을 때, 부교인 박춘권은 그를 생포하도록 명령하였다.

"당신은 총 한번 쏘지 않고 책만 던지던데."

"저희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오."

토마스목사 외에도 3명의 사람이 생포되었다.

평양감사는 이들에게 국법을 어기고 사교를 전하고 백성들을 살해하였으므로 모두 부교인 박춘권으로 하여금 참수토록 명하였다. 죄수로 묶여 있는 그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조용히 눈을 감고 주님만을 찾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대동강변에서 국법에 따라 한 사람씩 목을 베는 형벌이 실시되었다. 선장과 중국서기인 조능봉, 이팔행이 먼저 목베임을 당하였다.

"다음 영국 야소교목사 토마스"하자 북소리가 둥-둥-둥 울리기 시작했다. 칼을 잡은 박부교의 손이 높이 올려진 순간이었다.

"잠깐만 이걸 받아 주십시오. 제가 드리는 마지막 물건입니다."

이 말에 멈칫하고 놀란 박부교는 토마스목사가 내미는 작은 보따리를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그러자 토마스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이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일로 조선땅에 뿌린 복음이 열매로 맺게 하여 주옵소서."

1866년 9월 3일 28세의 젊은 나이로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목사는 대동강의 한사정 백사장에서 순교의 피를 뿌렸다.




토마스가 죽고난 다음 33년이 지난 1899년의 일이다.

"목사님! 저는 이제 더 이상 이대로는 못살겠습니다. 제가 토마스 목사를 죽인 박춘권입니다.

그때 그가 죽어가면서 제게 주었던 작은 보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책이었습니다. 그것을 읽고 제 마음이 찔려서 이렇게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있던 마펫선교사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영감님, 영감님이 토마스목사를 직접 보셨단 말입니까?"

"보다마다요. 제가 토마스목사를 죽였다니까요?"

"하나님께서는 토마스목사의 죽음을 통하여 영감님과 같은 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이제부터 영감님도 예수를 믿고 전하면 됩니다."

"목사님, 정말 그럴까요? 그때 셔어먼호가 불타는 가운데 사람들을 향하여 성경을 던지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어느 여관에 갔을 때 방안이 온통 성경으로 도배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여관주인을 불러서 연유를 알아보니 토마스목사가 포리에서 500여 권의 성경을 배포할 때 박영식이라는 평양감청 경비가 사람들이 버리는 책을 주워다가 도배를 했답니다. 그것을 여관주인인 최치량이 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관에 묵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이 글을 읽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제게 들려주면서 자신도 예수를 믿는다고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알기로도 토마스목사에게 성경을 받고 예수를 믿은 사람이 많습니다. 홍신길은 후에 대동문에 교회를 세웠으며, 그의 동생도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되었고, 김영섭은 원래 천도교였으나 동생 종권과 함께 교인이 되어 장로가 되고, 황명대는 셔먼호가 불탈 때 "야소, 야소"하는

소리를 듣고 평양 초대교회의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많습니다."

이렇게 토마스목사가 죽음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뿌렸던 성경은 살아서 조선의 교회가 세워지는 초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