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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대부흥회

기쁨조미료25 2007. 10. 11. 18:43

평양대부흥 운동

 

평양대부흥 운동

- 새로운 부흥의 물결을 기대하며 -



올해는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아 이 시대에 다시 한번 부흥의 바람이 불기를 소망하고 있다. Again 1907!  1907년 평양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100년이 지난 오늘 모두가 평양의 부흥을 꿈꾸는 것일까?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 보자.

1907년 1월 2일, 살을 에는듯한 매서운 겨울 바람이 몰아치는 평양.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를 무릅쓰며 하얀 바지저고리에 짚신을 신은 사람들이 예배당 안으로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안남도 전역에서 올라온 1000여명의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도(道)사경회가 열린 것이다. 6일부터 저녁집회가 시작되었다. 낮에는 평양시내 사람들은 참석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저녁에 열리는 저녁집회에는 평양시내 사람들도 참석이 허용되었다. 그 놀라운 평양대부흥운동은 사경회(부흥회) 기간, 특별히 사경회 마지막 14일과 15일 이틀 동안에 이루어졌다. 12일 블레어(H.E. Blair)가 말씀을 전할 때 은혜가 임했으나 13일 주일 저녁집회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고포드(Steven Goforth)의 말을 빌린다면 마치 놋쇠로 된 지붕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막는 것처럼 답답했고, 마치 사탄이 온 회중을 압도한 것처럼 그날의 영적분위기는 너무도 차가웠다고 하는데 오죽했으면 그날 말씀을 전했던 길선주장로가 ‘너희 다 죽었어?’ 라고 반문할 정도였다고 한다.

길선주장로는 물론 모든 선교사들은 이렇게 사경회가 끝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14일 정오기도회에 모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은 그들의 기도를 외면치 않으셨다. 그날 헌트(William B. Hunt )가 말씀을 전한 후 이길함목사가 나와 통성기도를 요청하자 청중들이 기도를 드렸다. 통성기도는 전날과 완연히 달랐다. 통성기도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을 다 돌려보내고 600명이 남아 새벽 2시까지 간절히 기도했다.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평가받는 평양대부흥운동은 바로 그 때 모인 남은 자 600명 가운데 임했다. 회개를 동반한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모인 이들 모두가 처음 체험하는 강력한 부흥이었다.

평양대부흥의 여러가지 분석과 견해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평양대부흥의 뿌리를 그때로부터 4년 전인 1903년 원산부흥운동으로 지목하기에 망설임이 없다.
원산부흥운동의 시작은 두 사람의 기도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화단 사건으로 원산으로 피신해온 여 선교사 화이트(Mary Culler White)와 캐나다 장로교 출신 여선교사 맥컬리(Louise Hoard McCully)가 선교사들과 한국인들 가운데 부흥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 기도회 소식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다른 선교사들도 하나 둘씩 기도회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이번 기회에 공개적으로 기도회를 갖기로 하고 의료 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에게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지 3번의 강의를 부탁했다. 부탁을 받은 하디가 강의를 준비하다 말씀과 만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제게는 조선인들을 사랑하는 진정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저들보다 제가 더 우월하고 뛰어나다고 생각해 왔으며,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의지하기보다는 의과대학을 나온 저의 학력과 실력을 과시하였습니다. 조선인들을 만날 때마다 불결하게 생각하였고 먹는 음식도, 문화도 생활도 미개하고 무식한 백성으로 생각하는 자만심뿐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디의 고백은 성령께서 이 모든 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이미 기도회 시작하기 전부터 말씀을 통해 은혜를 경험한 하디는 기도회를 인도하는 동안 내내 울면서 동료 선교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통회했다. 하디 자신이 고백했듯이 그것은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경험이었다. 그러나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그는 자신의 죄악과 잘못을 토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하디의 고백은 동료 선교사들의 회개로 이어졌다. 그 다음 주일 창전감리교회 예배 때 하디는 자신이 맡고 있는 회중들 앞에서 또 다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자신의 교만과 성령 충만하지 못함과 한국인들에 대한 인종편견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디의 고백은 한국인들의 회개운동으로 이어져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1903년 8월 이후 계속되었다.

이렇듯 원산부흥운동은 평양대부흥운동의 영적 각성의 모체였다.
다시 평양 장대현교회의 ㄱ 자 모양의 예배당으로 돌아가 보자.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장대현 교회 예배모습.
네모안은 평양대부흥운동회를 주도한 길선주 장로  
<사진출처 : 경향신문>

1907년 1월 14일 저녁 집회, 회개를 동반한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길선주에게서 시작되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약 1년 전에 친구가 임종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길 장로,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니 내 집 살림을 돌보아주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잘 돌보아드릴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산을 관리하며 미화 100달러 상당을 훔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는 그 돈을 미망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길선주가 이렇게 회개하자 교회당을 억눌렀던 이상한 힘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예배는 7시에 시작되었는데 새벽 2시가 지나도록 사람들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다. 이 집회에 직접 참석하였던 정익로 장로는 이날 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날 밤 길선주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이 가득 찼으며 순결과 성결로 불붙었다. 그는 길선주가 아니었고 바로 예수님이었다. 그는 원래 눈이 어두워서 나를 잘 보지 못하였을 것이나 나는 그의 앞에서 도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놓은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죄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질 때 나타난다. 길선주의 회개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 교회는 놀라운 오순절의 은혜를 경험하게 됐다. 1909년 게일의 ‘과도기 속의 한국’에는 그 순간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갑자기 길선주씨가 일어나 자신은 형제들을 질시했을 뿐만 아니라 방위량(블레어)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했다며 보기에도 비참할 정도로 땅바닥에 구르며 회개했다…한 교인이 일어나 자신의 죄를 자복하기 시작했다.그는 음란과 증오,특히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죄를 회개했다.그는 기도하면서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울었고,온 회중도 따라 울었다.우리는 그 순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있음을 분명하게 느꼈다.’

1월 15일 저녁 집회는 이미 집회가 시작되기 전 영적 분위기가 이전과 달랐다. 이날 말씀을 전하는 길선주의 얼굴은 거룩함으로 불타고 있었고, 그날 그곳에 모인 이들은 말씀 앞에 엎드려 자신들 안에 은밀하게 숨겨진 온갖 죄악들을 다 토로하였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한 홀의 죄악도 숨길 수 없었다. 사람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들이 그날 공개적으로 고백되었다.

장대현교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평양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숭덕학교와 숭현여학교에서도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장대현교회는 사경회가 끝났는데도 16일 수요일 기도회 때, 다시 20일 주일 예배 때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계속되었다. 평양 장대현교회의 성령의 소식은 곧 평양 전역으로 다시 한반도 전역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평양의 남산현 감리교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를 직접 목도한 노블 선교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보고했다:
“우리에게는 한국교회에 내 자신이 지금까지 목격하지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가장 놀라운 성령의 부어주심의 현시가 있었는데, 아마도 사도시대 이후 이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의 현시는 없었을 것입니다. 매 집회에서 주님의 권능(the slain)이 교회 전체와 때로는 밖에 임했습니다. 남녀가 회개의 역사로 고꾸라지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전 도시는 마치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통곡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평양시내 전역에 성령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 부흥의 불길은 교파를 초월하여 평양시내 교회들로 확산되었고, 평양시내 거의 모든 미션스쿨들도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다. 특히 숭실대학과 평양장로회신학교 개강 사경회 때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현시되었다. 이것은 장차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젊은이들과 목회자들을 영적으로 무장하고 새로 조직될 한국교회를 축복하시려는 비상한 성령의 섭리였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 있고 또한 꿈꾸는 100년 전 평양대부흥운동이다.
기록에 남아있는 내용들과 역사적인 배경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100년 전이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성령의 임재, 그리고 역사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안다. 우리에 앞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의지하여 우리는 기도의 끊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다시 한번 이 민족 가운데 임하소서. 부흥의 새 물결을 기대하며 겸비하게 하소서!


대부흥운동의 진행과정

1903 원산기도회
1904 개성·평양·서울·제물포 사경회
1905 개성·원산 신년사 경회, 장감 연합사경회,상동교회 청년 구국기도회
1906 평양선교사 사경회, 서울 북장고교 신년사경회, 이화·배재학당 신년부흥회, 목포 부흥회
1907 평양대부흥운동
1907 평양신학교, 숭실중·대학교, 숭덕여학교,평양여자 고등학교 등의 부흥회
1907 전국적인 부흥운동 (개성·선천·서울 광주·의주·대구·제물포)
1909‘백만 인을 그리스도께’: 백만인 구령운동 확산
908~1910 중국교회 대부흥운동(장사성, 호성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