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묵상·말씀자료]/칼럼

[스크랩] 《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서 본 영화 `콘스탄틴` 》

기쁨조미료25 2007. 10. 11. 07:12

《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서 본 영화 '콘스탄틴' 》

- 총신대 교지 제27권 46-57쪽에 실린 글 -

 

김경호 목사(샬롬방 신앙공동체 대표)

 

  오늘날은 대규모 흥행을 목적으로 막대한 자본을 들여 제작한 소위 '블록버스터'(blockbuster) 영화가 많이 쏟아지고 있다. 예전에는 기독교에서 그 소재를 따온 영화는 블록버스터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요즘에는 기독교에서 소재를 딴 영화 가운데도 블록버스터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전 세계적인 흥행돌풍을 일으킨 "매트릭스"(Matrix)도 실상 알고 보면 기독교에서 그 모티브를 따왔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시온, 느부갓네살, 트리니티'처럼 기독교에서 직접 따온 용어가 등장하는 것 외에도 주인공 네오를 가상세계인 매트릭스의 구원자로 묘사한 것이나 모피어스를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으로 설정한 것은 모두 기독교에서 소재를 따온 것이다.

 

  영국의 작가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의 원작을 피터 잭슨이 영화화한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은 비록 기독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기독교적인 메시지와 교훈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예컨대 반지는 인간의 탐욕을, 어둠의 제왕 사우론은 사탄을, 흉측하게 생긴 우르크하이족과 요르크족은 사탄의 추종자인 악령을, 인간을 돕는 요정은 천사에 빗댈 수 있다고 한다.

 

  "반지의 제왕 제3편-왕의 귀환"(2003년 12월 개봉)에 보면 곤드로의 왕위 계승자인 아라곤이 선두에 서서 사우론의 군대와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는 사탄의 군대와 싸우려고 십자가 군병들을 거느리고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또한 사우론의 본거지이자 화염과 용암으로 들끓는 모르드르의 산은 사탄이 지배하는 지옥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죄로 물든 인간 본연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조망되고 있다는 점도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절대 반지를 가지려고 하는 욕심과 그것을 손가락에 끼었을 때 형체가 사라지고 악의 세계를 보고 악의 소리를 듣는 모습이란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을 때의 모습과 같다. 이와 같은 특징 때문에 반지의 제왕은 원작이 나왔을 때부터 이미 서구 기독교계에서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예술적 상상력으로 결합된 작품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소재를 따온 영화는 양날의 칼과 같아서 반지의 제왕처럼 기독교적 세계관을 암시하는 순기능이 있는가 하면 이를 왜곡하는 역기능 역시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국내에서 2005년 2월에 설을 앞두고 개봉된 "콘스탄틴"(Constantin)은 기독교에서 그 소재를 따왔지만 그 내용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왜곡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이 영화에는 매트릭스에서 네오역으로 출연한 키아누 리브스가 콘스탄틴역으로 등장하여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면서 국내에서 2005년 1/3분기에 개봉된 외국영화 중 최고의 흥행을 거두었다.

 

  그럼 콘스탄틴은 어떤 점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왜곡했는가? 먼저 콘스탄틴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살펴보기로 하자.

 

  콘스탄틴은 한 멕시코인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찌른 창, 즉 '숙명의 창'을 발굴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세상에는 인간의 형상을 한 혼혈 천사와 혼혈 악마가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주인공인 '콘스탄틴'(키아누 리브스)은 그들을 구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콘스탄틴은 천국과 지옥의 경계를 넘나들며 혼혈 악마를 지옥으로 보내는 퇴마사 역할을 한다. 그가 이 일을 하는 목적은 사후 지옥에 떨어질 운명에 처해있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데 있다. 즉 그는 이 일을 함으로써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담배에 찌들어 살던 콘스탄틴은 결국 폐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데 어느날 강력계 여형사인 안젤라가 찾아와서 쌍둥이 여동생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도움을 요청한다. 그후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와중에서 그들은 사탄의 아들 '마몬'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몬이 세상에 태어나려면 몸을 빌려주는 영매 역할을 할 여자와 예수님을 찌른 숙명의 창이 있어야 하는데 여형사 안젤라가 영매 역할을 하게 되고 숙명의 창을 발견한 멕시코인은 사탄의 인도에 따라 안젤라에게 찾아온다. 이제 가브리엘 천사가 숙명의 창으로 안젤라의 배를 가르면 마몬이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을 암흑천지로 만들어버리는 일만 남아 있다.

 

  결국 이 영화는 콘스탄틴이 마몬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콘스탄틴을 지옥으로 데려가려고 했던 사탄 루시퍼는 도리어 콘스탄틴의 병을 치료하고 그를 살려주게 되고 콘스탄틴은 담배를 끊고 새로운 삶을 산다.

 

  이상이 콘스탄틴이라는 영화의 대체적인 줄거리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비록 기독교에서 소재를 따온 것이긴 하지만 그 내용은 기독교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이를 몇 가지 지적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주인공 콘스탄틴에 대해서

 

  콘스탄틴은 악령을 퇴치하는 퇴마사로 활동하는데 그가 악령을 퇴치하는 방법은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다. 그는 주술과 성스러운 도구를 통해서 악령을 퇴치하는데 성경 그 어디에도 주술로 악령을 퇴치할 수 있다는 말씀이 없다. 오히려 성경은 사술행위 자체가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죄악이라고 규정하고 있다(왕하 17:17).

 

  또 콘스탄틴이 악마를 물리칠 때 사용하는 무기는 성수, 십자가, 은으로 된 총알, 다메섹 도상의 돌조각, 사제들이 축복한 십자가와 성물들, 화염 분사기처럼 3미터 길이의 불길을 뿜어내는 용의 입김 등등인데 이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은 사탄을 대적할 수 있는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지 인위적인 도구가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콘스탄틴은 마음만 먹으면 주술을 이용해서 지옥을 자기집처럼 드나들 수 있다. 그러나 지옥은 세상에서 자기집 안방처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지옥은 한 번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곳이다(눅 16:26). 퇴마사라고 해서 지옥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는 발상은 지옥의 실체를 왜곡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콘스탄틴을 사탄의 지배로부터 세상을 구원하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세상을 구원하러 그가 돌아왔다"는 타이틀이 있는데 이것은 매트릭스에서 세상을 구하는 자로 등장하는 네오의 역할을 콘스탄틴에게도 적용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콘스탄틴은 악의 지배로부터 세상을 구원하는 존재로 영웅시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 외에 사탄의 지배로부터 세상을 구원할 자가 없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인간을 세상의 구원자로 묘사한 이 영화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전혀 맞지 않다.

 

(2) 사탄 루시퍼에 대해서

 

  사탄은 죽은 사람을 지옥으로 데려가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는데 성경은 사람이 죽으면 먼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재판을 받는다고 증거하고 있다. 따라서 사탄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도 거치지 않고 지옥으로 데려간다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또 루시퍼에게는 지옥에 있는 사람을 천국으로 보낼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영화의 끝 부분에 콘스탄틴이 루시퍼에게 자살로 지옥에 간 이사벨을 천국에 보내달라고 부탁하자 루시퍼가 이를 수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같은 묘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다. 사람을 천국이나 지옥으로 보내는 이는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사탄도 결국 심판을 받아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증거하고 있는데(계 20:10) 루시퍼가 지옥에 있는 사람을 천국으로 보낼 수도 있다는 것은 기독교의 심판론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루시퍼는 또 생명을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한다. 콘스탄틴은 생애 두 번의 자살을 시도했는데 이때마다 루시퍼가 나타나 그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 이는 모든 생명의 창조주와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라는 성경의 생명관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내용이다. 성경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증거한다(마 10:29).

 

  그외 사탄에게 '마몬'이라는 아들이 있는데 그는 영매와 '숙명의 창'이 있으면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탄이나 천사는 인간과는 달리 자녀를 생산할 수 없다. 따라서 사탄에겐 절대 아들이 있을 수 없으며, 사탄이 인간의 몸을 빌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영화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사탄에게도 교묘히 적용시키고 있다.

 

(3) 가브리엘 천사에 대해서

 

  영화 콘스탄틴은 가브리엘 천사에 대해서도 왜곡하고 있다. 가브리엘은 인간의 형상과 날개를 가진 혼혈 천사로 등장하며, 마몬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도록 돕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숙명의 창으로 안젤라의 배를 가르고 사탄을 꺼내려고 했던 이가 바로 가브리엘 천사이다.

 

  이처럼 가브리엘 천사는 악역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사실 성경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위치는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메신저이다. 다니엘에게 환상의 뜻을 전한 이와 세례 요한의 탄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한 이도 바로 가브리엘이다. 이처럼 가브리엘은 자의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인간들에게 그대로 전해주는 전령사이다.

 

  그러나 콘스탄틴에서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되이 전하면서 인간세계를 암흑천지로 몰아넣는데 일조하려는 부정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또 가브리엘은 루시퍼와의 싸움에서 날개가 불타 없어지고 인간이 되는데 천사와 인간은 그 출신성분이 다르기 때문에 천사가 인간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영화 콘스탄틴은 하나님의 메신저인 가브리엘 천사를 왜곡하고 오히려 그와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사탄 루시퍼를 더 미화하고 있다.

 

(4)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콘스탄틴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도 왜곡하고 있다. 가브리엘 천사에 의하면 사람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회개하고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기에 은총을 받을만한 자를 제한하려고 하나님이 마몬에게 세상을 지배할 권세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즉 마몬이 세상을 암흑으로 만들었을 때 이를 이겨낸 사람만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인간의 죄와 무가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거저주시는 특별한 사랑"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즉 은총은 이것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자에게 그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탄의 지배를 이겨낸 사람에게만 은총을 베푼다는 것은 기독교의 은총론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5) 구원론에 대해서

 

  콘스탄틴이 퇴마사가 된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이다. 그는 악마를 지옥으로 돌려보내야만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는 자신의 운명이 뒤바뀌어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보았다. 그러나 기독교는 구원은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진다고 가르치고 있다.

 

  물론 악마를 지옥으로 보내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콘스탄틴의 착각으로 밝혀진다. 그래서 나중에 콘스탄틴이 구원을 받기 위해 취한 행동은 '자기 희생'이다. 결국 콘스탄틴이 자기 희생을 통해 천국에 들어가게 되자 이를 보고 놀란 루시퍼는 "네가 진정으로 지옥에 속한 자임을 스스로 증명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하고 말하며 콘스탄틴의 병(폐암)을 고쳐주고 그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구원의 방법은 회개와 믿음이지 자기 희생이 아니다. 이 영화는 콘스탄틴이 유리조각으로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하며 루시퍼에게 지옥에 떨어진 안젤라의 쌍둥이 동생 이사벨을 천국에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방법으로 자기 희생을 하여 천국으로 가는 걸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기독교 구원의 진정한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지옥은 누구를 대신하여 갈 수 있는 곳이 결코 아니거니와 콘스탄틴은 이사벨 대신 자신이 지옥에 가겠다는 식으로 자기 희생을 하려고 했지 신에 대한 믿음과 회개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틴이 자기 희생이라는 방법으로 천국에 가는 것으로 묘사된 것은 기독교의 구원론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상으로 콘스탄틴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왜곡하고 있는 부분을 몇 가지 들어보았다. 혹자는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상업적인 영화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콘스탄틴에 대한 평을 인터넷에 올렸을 때 수천명의 네티즌들이 이 글을 읽고 여러 가지 의견을 올린 바 있다. 그들 중에는 콘스탄틴은 기독교적인 소재를 차용한 상업적인 오락물일뿐 기독교를 왜곡한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콘스탄틴은 흥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상업적인 영화이지 기독교적인 교훈이나 메시지를 전하려는 종교 영화는 아니다. 사실 영화는 영화 그 자체로만 이해하고 그냥 즐기면서 보면 별 탈이 없다. 신앙심이 두터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콘스탄틴을 관람했다고 해서 신앙이 흔들리거나 믿음이 식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잘 모르는 사람이 콘스탄틴을 봤을 때는 기독교에 대해 오해할 소지는 분명히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소재를 딴 영화가 기독교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부분이 있으면 비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해 오해하지 않도록 이를 바르게 지적해줄 필요가 있다. 영화에 비평이 필요한 이유 중에는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고 현실 역시 영화의 영향을 받는다는 데 있다.

 

  지난 1999년 10월에 개봉된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후 실제로 이를 모방하여 주유소를 터는 범죄가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이것은 픽션에 불과한 영화가 현실세계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이다.

 

  한국영화는 2000년대에 들어서서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년 3월 개봉)가 800만의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신기록을 세운 이후 "신라의 달밤, "가문의 영광", "조폭마누라", "두사부일체" 등등 조직폭력배를 소재로 한 조폭영화의 붐이 일어났다. 그런데 조직폭력을 미화하는 이같은 영화는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미쳐 조폭을 영웅시하고 '일진회' 같은 학교폭력조직을 양산하는데 일조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또 콘스탄틴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김호준 감독의 "제니, 주노"(2005년 2월 개봉)라는 한국영화는 불장난으로 아기를 임신한 15세 소년소녀가 어른들 몰래 아기를 낳을 준비를 하려다가 들통난 후 아기를 지우려는 어른들로부터 아기를 지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결코 옳다고 할 수 없는 10대 청소년들의 불장난 같은 사랑을 지나치게 미화하여 개봉 전부터 청소년들에게 성(性)에 대한 가치관의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많이 제기되었다.

 

  반면에 저예산으로도 흥행에 크게 성공한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2002년 4월 개봉)와 자폐증을 앓는 마라토너의 이야기를 다룬 정윤철 감독의 "말아톤"(2005년 1월 개봉)은 불우하고 소외된 계층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따뜻한 감동을 선사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이것은 영화는 양날의 칼과 같이 순기능과 역기능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가 현실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인 신앙과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영적인 무장을 해야 비록 반기독교적이거나 유해한 영화를 관람하더라도 이의 영향을 덜 받을 수 있다.

 

  지난 1990년대에 낮은 울타리의 신상언씨 등이 뉴에이지 사상은 사탄의 문화전략이라고 하면서 영화나 예술 등의 대중문화 속에 침투한 뉴에이지 사상의 위험성을 경고한 적이 있다. 물론 이들의 주장은 많은 타당성을 지니고 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에 공감하고 있다. 콘스탄틴도 이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사탄과 악마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사람들의 믿음을 실족케 하는 위험을 지닌 뉴에이지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탄이 대중문화를 통해 사람들을 미혹케 한다 할지라도 대중문화와 담을 쌓고 지낼 수는 없다. 대중문화는 이미 사람들의 일상에 깊이 파고들어가서 이것을 즐기는 것은 삶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신상언씨 등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따를 경우 그리스도인이 즐길 수 있는 문화는 극히 제한되고 만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인은 대중문화와 담을 쌓고 지내는 것이 좋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대중문화를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안목이 무척 필요하다 하겠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성경에 깊은 뿌리를 내린 기독교적인 세계관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8에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권면했다. 바울이 이같은 권면을 하게 된 배경에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인해 부활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은 복음의 중심 메시지이자 기독교의 핵심적인 사상이라고 논하면서 부활의 확실성을 증거했던 것이다. 따라서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은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무장하여 흔들리지 않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권면한 말씀이다.

 

  성경에 바탕을 둔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중무장한 사람은 콘스탄틴 같은 영화가 아무리 화려한 액션과 뛰어난 그래픽과 그럴싸한 스토리로 다가온다 해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탄의 전략수단이라는 대중문화의 파고가 어느 때보다 드높은 현대사회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성경 중심의 신앙과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영적 무장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출처 : 도형분석상담연구소
글쓴이 : doulos12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