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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리스도인의 비전

기쁨조미료25 2007. 10. 9. 09:47

그리스도인의 비전

리처드 미들톤, 브라이안 왈쉬 /: 황영철 / 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C. S. Lewis는 그의 책 [순전한기독교] 를‘옳고 그름’이라는 명제를 제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내세우기 전에 ‘이 세상에 어디에 나발견할 수 있는 명백한 개념인‘ 옳고 그름’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서부터 논리를 전개 시켜 나가는 방법이다.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이런 접근법은 기독교 변증의 중요한 방법임에 틀림없다.

성경적 세계관의 틀인 창조, 타락, 구속을 명쾌하게 밝힌 후 현대를 지배하는 세속적 세계관의 근원과 발전 과정을 예리하게 규명한다. 문화, 정치, 학문, 예술 등 삶의 전 영역에 걸쳐 기독교적 세계관을 정립한다.

본서의 저자들도 이런 방법으로 책을 시작하고 있다. 이런 순서를 따름으로 우리는 보편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옮겨감으로 우리 속에 깊숙이 배어 있는 저항감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출발로 힘입어 우리는 문화 속에 녹아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비교하면서 세계관이 존재함과 그 세계관을 비교함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혹은 ‘훌륭한’ 세계관이 과연 무엇인가에 초점으로 집중케 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들은 그 ‘훌륭한’ 세계관은 기독교적 세계관이며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세계관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이 성경이므로 성경적 세계관임을 피력하고 있다.

이 책을 보기 전에는 세계관과 철학 혹은 신학에 대한 상관관계와 세계관과 철학 혹은 세계관과 신학을 어떻게 구분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이 책을 통해 세계관은 신학이나 철학같은 사고의 체계가 아니라는 점과 함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전 이론적인 것이므로 세계관을 철학적 혹은 신학적 체계와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며 세계관은 언제나 그런 체계보다도 기본적이면서도 그런 체계 속에 전부 포함되지 않음을 정확히 알게 됨으로 세계관을 이해하는데 많은 유익을 받게 되었다.

세계관의 틀은 아마도 대동소이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 타락, 구속 혹은 구원으로 말하는 틀은 거의 일치하나 ‘완성’에 대한 견해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른 것 같다. 본서의 저자는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틀까지만 기록하고 있다. 이는 알버트 월터스와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전광식도 구속까지를 기독교세계관의 범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완성(consummation)’이라는 범주까지 가입되어야 진정한 세계관의 완성이라는 주장도 제기되는 것이 사실이다. Lesslie Newbigin은 창세기 1-2장 이 창조에 대한 한쪽 책임이라면 요한계시록 21-22장은 다른 한쪽은 완성이라는 책임이라고 할 정도로 완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본인도본저서에서 완성의 부분까지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다니엘 2장의 느부갓네살이 본 신상을 과학, 기술, 경제주의라는 우상으로 보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과 함께 굉장한 통찰을 얻게 되면서 이 아쉬움은 일소되기에 충분하였다. 저자로부터 이런 귀한 통찰을 통해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는 세계관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된 점은 책을 읽는 유익 중에 으뜸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저자는 비록‘ 뜨인 돌’이라고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수어 버리게” 하는 그 뜨인 돌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저자는 이제 이런 우상으로 벗어날 해결책을 기독교를 제시하면서 찾으려고 한다. 이제까지 우상들에 의해 인간의 삶을 억눌렸고 저자는 이런 상황을 정신적인 위기라고 말하면서“정신적인위기는 정신적인 해결을 필요로 한다.”고 명제를 통해 그에 대한 대안으로 기독교를 제시하려고 하고 있다. 저자는 우상을 깨는 뜨인 돌로 기독교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본인은 의구심이 들었다. 왜냐하면 요즈음은 그 정신적인 위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세계관으로 가지 않고 동양의 다양한 정신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종교에 대해 정신적인 위안과 답을 찾으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가 기대했던 대안을 찾는 일들은 일어났지만 그러나 기독교적인 방향이 아닌 동양의 다른 종교에서 찾게 되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아마도 저자가 이 책을 쓸 당시의 정신적인 해결책은 기독교적인 방법으로 귀결되는 것이 보편적인 것이었겠지만 이제는 판세가 역전되어 동양의 정신적인부분에 대해 관심이 높아진 상태이다. 이제 사람들은 요가나 참선 그리고 동양사상을 통해 정신적인 해결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서는 서양의 세계관에 대한 지적과 대안으로서의 기독교는 정확히 지적하고 피력한 점은 인정되어지나 동양의 세계관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의 대안 제시는 미흡한 부분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문화변혁을 위해 공동체를 강조하고 있다. 이 강조는 Lesslie Newbigin 이 그의 책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에서 믿음의 공동체를 강조하는 것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혼자서는 도저히 이루지 못하고 꿈도 꾸지 못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저자는 공동체를 통해 극복해야 함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요즘 본인은 이런 공동체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공동체갱신에 대한 연구들을 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 글을 다시 읽으면서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되었다. 본인에게 있어서의 진정한 의미로서 비전(transforming vision)이라고 할 때 이 공동체의 갱신에 대한 비전이 있다. ‘완성(consummation)’되는 그날까지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집중하고 싶은 본인의 비전은 공동체의 갱신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런 깨달음과 도전을 준 귀한 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런 공동체를 위해 199쪽에서“교회공동체는 예술이 장려되며 미적 생활이 풍성한 곳 이어야함”을 저자는 강조하면서 교회는 심지어 교회공동체내의 문인, 음악가 그리고 미술가에게 경제적인 지원까지라도 제공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점이다. 이는 경제적 동인으로 교회의 봉사직을 운영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이다. 특히 교회에서 자신의 봉사적 직무를 사역의 대가를 받아 가며 하는 것은 공동체에 위화감을 조성하거나 엘리트화를 부추기는 악영향을 준다는 선례를 통해서도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한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출처 : 선지자와 예언
글쓴이 : 오인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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