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복음에 대해서
본문: 갈라디아서 1장 1-10절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5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강의하면서 복음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성경 중에서 복음의 진리를 가장 잘 말해주고 있는 책 중에 하나가 바로 갈라디아서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책이 로마서이기도 합니다. 물론 고린도전서도 매우 중요하고, 다른 서신서들도 다 중요하고 다른 모든 성경책도 중요합니다.
앞으로 갈라디아서 전체를 쭉 살펴보면서 믿음으로 서는 삶, 주님의 십자가만 의지하는 삶, 주님 안에 거하는 삶, 혹은 주님이 내안에 거하는 삶, 주와 동행하는 삶, 날마다 삶속에 주님의 승리를 경험하는 삶, 이러한 부분들을 살펴보면서 여러분이 실재로 그것들을 경험하고, 배우고, 그 안에 서게 되는 그러한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제가 한 구절 한 구절 성경공부 식으로 가르치기보다는 그러한 삶에 대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부분들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갈라디아서도 다른 서신서와 마찬가지로 먼저 사도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고, 문안하고 있지만, 곧바로 그 당시 문제가 되었던 율법주의 신앙인 거짓복음에 대한 부분으로 직접 들어가고 있는데, 우리가 오늘 이 부분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사도 바울은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의지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바울은 먼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으로가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볼 때,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능력을 그의 삶에서 실재로 의지하고 살았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하는 것을 여러분이 이론적으로 믿는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능력을 실재로 삶에서 의지하고 사는 것과는 매우 다른 차원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도 고난을 당합니다. 실재로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고난이 끝나는 게 아닙니다. 고난이 더 올 수도 있습니다. 사단은 여러분을 시기합니다. 한 예로 여러분들이 그동안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었는데, 정신 차리고 이제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지 하고 주님 앞에서 잠잠히 기다리고, 주님을 가까이 하고, 주님을 더 사랑해야지 하면 환경이 좋아지는 게 아니고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영적전쟁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을 보시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에베소에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큰 환난을 당했습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그런데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서 또한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자신이 받은 위로로 위로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 주변에 어떤 사람이 고난을 당합니다. 그래서 옆에서 ‘참으세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런 위로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 있습니다. 다 맞는 말이고 정답인데도 그 사람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이론이니까요. 그런데 여러분이 매우 큰 고난을 당했을 때, 그 가운데서 주님이 주는 능력을 발견하고 믿음으로 그 고난을 이겼다면, 그때는 그것을 나누면 그건 매우 대단한 힘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치유하고, 상대방을 회복시켜 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큰 고난을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당했는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사 자기에게 먼저 하나님의 위로가 넘쳤을 뿐만 아니라 고난을 당한 자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더 말하고 있습니다.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영어성경에 보면 더 잘 나와 있습니다. “We were under great pressure, 우리는 큰 압박 가운데 있었다. far beyond our ability to endure, 견디는 우리의 능력을 훨씬 초월하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압박을 받았다. so that we despaired even of life. 그래서 우리는 심지어 우리의 목숨까지도 포기했다. 9 Indeed, 실재로 in our hearts 우리 마음속에서 we felt the sentence of death. 우리가 죽음의 선고를 느꼈다. 그러면서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그러나 this happened 이 일이 일어났다. that we might not rely on ourselves but on God, who raises the dead.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곧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뢰하도록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사도 바울도 이 사건을 통해서 더 배운 겁니다. 뭐를 배웠냐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실재로 삶에서 의뢰하는 것을 배웠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 그분 믿어요. 그 말하고는 전혀 다른 겁니다. 이것은 그의 삶에서 실재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을 고난을 통해서 배웠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살리신 그 부활의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이러한 환난을 통해서 실재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배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이 그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도 바로 그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 위에 서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15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그러면서 기도하는 내용이 17절부터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성령(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데, 성도들로 하여금 마음 눈이 맑혀져서 그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원한다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3장에서도 또 기도하고 있습니다.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여러분이 구하는 모든 것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그 모든 것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그 능력이 여러분 가운데 지금 행하고 계시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게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너희가 깨닫게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부활의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실재로 삶에서 배웠듯이 에베소 교회가 그들 가운데 지금 역사하시는 그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 능력을 의지하고, 그 능력을 신뢰하고, 그 능력의 하나님을 믿도록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인데, 빌립보서 3장에서도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사도 바울은 그의 사역의 종점인 로마 옥중에 갇혀있는 그 시점에서도 예수님을 더 알기를 원했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더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단순한 이론이 아닌 실재로 우리의 삶에서 그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고난을 통해서 배우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 나가면서 배우게 됩니다.
둘째,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
부활의 능력과 같이 가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 둘이 같이 가야 합니다. 빌립보 3장에서 나왔듯이 사도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그러면서 복음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영어성경에는 다른 복음에 “”표가 되어있는데, 그 당시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른 복음을 좇아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과 다른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실재로는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습니다.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여기 ‘요란케 하여’ 라는 말을 영어성경에 보면 Evidently some people are throwing you into confusion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혼돈 가운데 집어넣는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실재로 다른 복음이 있는 게 아니고, 그것은 거짓 복음인데 혼돈 가운데 들어가는 것뿐이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여기에 ‘변한다.’ 말도 영어성경에 보면, are trying to pervert the gospel of Christ.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 함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복음’이라는 말은 혼돈 가운데 빠뜨려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는 거짓 복음인 것을 말합니다. 다른 복음이란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에는 심판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래서 거짓복음에는 매우 심각한 저주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복음’ ‘거짓복음’을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율법주의 신앙인데, 사도 바울은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그렇게 말했는데,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사도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동시에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뭐냐? 간단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7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의 지혜로 전하면 그 능력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바로 그 다음 절에 보면,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러면서 22절입니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바로 이겁니다. 복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이론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복음은 인격체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인격체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진리가 아니고,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이 아니고,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이었습니다. 그분이 능력이고, 그분이 지혜입니다. 또 30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이론이 아니고, 어떠한 사실이 아니고, 어떠한 사건이 아니고, 어떠한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혜가 되시고 예수님이 의로움이 되시고 예수님이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십니다. 아멘,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라고 했습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십자가에서 능력이 소멸되지 않기 위해서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십자가의 도란 앞에서 말한 대로 십자가에 관한 이론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간단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능력이요. 그 예수님이 지혜요. 그 예수님이 거룩함이요. 그 예수님이 구속함이요. 그러기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2장을 보십시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헬라어는 ‘남성과 중성’ 중에 어는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지는데, 밑줄 친 부분이 헬라어에는 남성과 중성의 어미가 똑같습니다. 그런데 영어성경은 밑줄 친 부분을 다 남성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앞 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 외에는” 이렇게 보는 게 훨씬 옳습니다. 그래서 N.I.V 성경에는 “2 For I resolved to know nothing while I was with you except Jesus Christ and him crucified. 내가 너희 가운데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시니까요. 그분 자체가 우리에게 부활이고, 그분 자체가 우리에게 능력이고, 그분 자체가 우리에게 지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분을 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먼저 그분을 진실로 알기 원했습니다. 왜냐면 그분을 알아야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이론을 말한다면 그는 벌써 다 띄었고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에게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면 자기들은 벌써 다 띈 거라고 생각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복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복음은 인격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이론적인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에게 능력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고, 그분이 지혜가 되고, 그분이 구속함이 되고, 그분이 거룩함이 됩니다.
골로세서 1장 27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다른 말로 하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을 전했는데, 그 하나님의 비밀은 복음의 핵심 결정체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한마디로 줄이면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분이 바로 우리의 영광의 소망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능력이고, 예수님이 지혜고, 예수님이 구속함이고, 예수님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예수님이 여러분의 영광의 소망입니다. 여러분의 영광의 기초입니다. 여러분의 영광의 근거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그러면서 2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보십시오. 예수님을 전하고 그분을 만나게 될 때 사람이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론을 듣고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 골로세서 2장 6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러면서 8절을 보세요.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여기서 헛된 속임수란 사람의 전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세상의 원칙과 원리들을 좇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인데 혹시 헛된 속임수가 뭔지 아시겠어요? 그에 대한 답변은 그 아래 16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여기에 먹고 마신다는 말은 그 당시에는 시장에서 파는 모든 고기들은 이방인의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난 후 시장으로 나오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들 간에 먹는 것 때문에 서로 알력이 있었습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안먹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그랬냐면, ‘저 믿음 없는 것들,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감사함으로 먹으면 되지’ 이렇게 말했고, 안먹는 사람들은 뭐라고 그랬냐면, ‘저 타락한 것들, 고기가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다 먹어’ 이렇게 서로를 비방했습니다. 신앙적인 면을 말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절기가 나오는데, 모든 절기를 다 지키는 겁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사순절, 부활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등 입니다. 그리고 월삭은 매월 첫날을 말하는데, 그 당시에는 매월 첫날에는 특별한 예배를 드린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란 겁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잘 들으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는 아무런 절기도 지킬 필요가 없다. 그 말인가? 아닙니다. 바로 그 다음 17절에 보면 답이 나옵니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우리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의식들은 그림자이고 몸(실재)은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앞에서 얘기 했듯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이론이 아니라 인격체이신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본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의 본질을 위해서 지금 언급된 것들은 모두가 이 본질을 표현하는 하나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그럼 철학과 세상초등학문이라는 말은 뭐냐? 여러분이 이 신앙의 본질인 예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 사도 바울이 그림자라고 말하는 외부적인 절차(의식)들을 잘 지키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유전(전통)을 따르는 것이고, 철학과 세상초등학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생명도 없습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다. 그분을 아는 만큼 우리는 변화됩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여러분이 주일 예배를 나오면서 우리 위에 십자가에 달린 그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더 알기 원하고, 주님을 더 알기 원하여 그 가운데 서기 원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원하고, 주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나오기를 원해서 오셨다면 그것이 귀한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니라 주일날은 빠지면 안되지, 성수주일은 온전히 지켜야 돼, 그래서 우리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예배에 참석하여 그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는 자세로 여기에 와 있으면, 이것은 인간의 전통을 따르는 것에 불과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주일을 지키는 거라도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느냐에 따라서 유전(전통)을 따르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그러면서 9절을 보세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성품의 모든 충만함이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주님을 전하고, 그 주님을 알고, 그 주님을 사모하고, 그분을 더 알기를 열망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의지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진실로 알기 원했습니다. 그 십자가의 능력 위에 서기 원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이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님을 더욱 알고, 그 십자가의 그 공로를 더 깨닫기 원하고,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그 하나님의 권능과 역사를 더 알기 원하고, 그래서 그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주님 앞에 서는 것을 그가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놀라운 승리가 있었고, 이러한 삶을 위해서 하나님께 예배도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고, 헌금도 드리는 것이고, 여러 가지 외부적인 것들이 있었던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20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문자를 외부적으로 지키는 것을 우리의 신앙의 본질로 아는 그것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제 얘기는 뭐냐면 어떠한 것을 의식적으로 먹고 안먹느냐에 우리의 신앙의 본질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본질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고, 그분을 믿는 것이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구별할 것을 구별하고, 버릴 것은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22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결국 전통적으로 의식을 좇는 것에 불과하다 그 말입니다.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자기가 스스로 숭배하는 거라 그 말이지요. 종교적인 모양은 매우 귀할 수 있습니다. 겉모양을 보고 그 사람 매우 신앙 좋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자의적인 겸손은 진정한 겸손이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서 고개는 많이 숙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여기 나와 있는 것처럼 이러한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는 절대로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와서는 매우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는데 돌아가서는 전혀 안믿는 사람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되어있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신뢰하고, 주님을 알게 될 때, 주님이 우리의 능력이 되시고, 주님이 거룩함이 되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서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고, 주님 안에서 더욱 더 충만한 데까지 자라기 때문에 주님을 아는 데서 우리 삶이 변화되는 것이지 외부적으로 종교적 모양을 잘 갖춘다고 해서 절대로 변화의 능력이 없습니다. 거기에 육신을 이기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자의적인 예배와 임의로 하는 겸손에 불과하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을 봅니다.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여기 개들은 멍멍 개를 말하는데 실재로 개를 말하는 게 아니고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팔 일 만에 할레를 받았다는 말은 자기는 진짜 유대인이란 말입니다. 미국가면 외국에서 이민을 와서 미국 시민권자 받은 자가 있고,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권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헨리 키진저는 하버드대학원 정치학 박사요 교수를 지냈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요 미국 국방장관까지 지낸 매우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왜 미국 대통령에 못 나오는지 아세요? 그것은 그가 미국에서 안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미국 법에는 미국에서 태어나야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옛날에 박정희 시대는 어느 고등학교를, 전두환 시대는 어느 고등학교를, 노태우 시대는 어느 고등학교를, 김영삼 시대는 어느 고등학교를, 김대중 시대는 어느 고등학교를 나온 게 귀공자고...(출세와 관련) 이런 얘기가 많았습니다. 베냐민 지파라는 말은 유대인의 초대 왕이 베냐민 지파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그 당시 바리세인들이 율법을 가장 철저하게 지키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인정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한국에는 총신대 나오면 가장 훌륭한 신학교 나왔다고 목사님들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데, 바울은 이것들을 육체를 신뢰하는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내가 어느 신학교 나왔는데, 내가 지금 어느 교단에 속했는데, 우리 교단이 장자 교단인데, 내가 지금 어느 교회를 나가는데, 지금 우리 교회는 성도가 몇 명인데, 우리 교회는 예산에 얼마인데, 내가 지금 총회장인데, 이것들이 육체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이라는 말은 그 얘기입니다. 그리고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을 개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심하게 말하는 게 아니고 지금 성경이 하는 말입니다. 육신을 자랑하는 자들을 개라고 말합니다. 전에는 사도 바울을 사람들이 알아주었습니다. 왜냐면 그는 대단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그게 아니고 뭐냐?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가 복음을 깨닫고 나니까. 예수님을 경험하고 나니까. 그게 다 배설물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손해를 끼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분을 만나고 나니까 세상에서 잘 알아주는 종교적인 배경들, 이거는 통(배설물)에 불과하다. 그 말입니다. 그것을 의지하는 것은 똥을 의지하는 겁니다. 가슴에 똥으로 만든 훈장을 붙이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영적으로 소경인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그것들이 대단해 보이겠지만, 그래서 그것들을 자랑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똥으로 만든 훈장을 달고 다니는 겁니다. 내가 성경을 몇 번 읽었는데, 성경을 몇 번 읽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육체의 자랑을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 똥으로 여겨 다 버렸다고 말합니다. 왜냐면 주님을 아는 것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그리스도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발견되는 게 오직 믿음으로 간능하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서 1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알기 원한다. 내가 그 부활의 권능을 알기 원한다. 그리고 내가 그분과 함께 고난에 동참함도 알기 원한다.” 제가 지금 몇 가지 성경구절을 살펴봤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이요. 하나님의 모든 신성이 그 안에 다 있고,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그 안에 다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만큼 그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신뢰함으로만 그분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분이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분을 전할 뿐만 아니라 바로 자신이 먼저 그분만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적인 것들은 예수님을 알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인 예수님을 알기보다 종교적인 행위와 의식들을 의지하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삼을 때, 그것을 신뢰하게 될 때, 그들을 개들이라고 말합니다.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변질하는 겁니다. 이것이 세상의 초등학문이요 철학이라고 말하고 있고, 인간의 속임수라고 말하고 있고, 전통을 따르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의지했고요. 십자가지신 예수님을 전하고 의지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부활의 주님을 의지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냐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게 필요합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성령님의 조명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제가 아무리 가르쳐봐야 되지 않고, 저도 개인적으로 아무리 배워도 되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저에게 조명해 주셔야 압니다. 제 수첩에는 제 개인적인 기도제목들을 적어놓은 게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그 기도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제 깊은 속에서부터 기도가 나오는 것을 느낍니다. 왜냐면 제가 임의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비춰주셨던 부분들을 써놓은 것이니까요. 그중에 하나는 모세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갖기를 원하는 겁니다. 하나님 영광 가운데 들어가는,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 서되 우리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서기 원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에게 어떤 부분을 비춰주셨느냐 면, 하나님 앞에 제가 섬기는 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를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기도하러 그분 앞에 서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을 조명해주셨습니다. 실재로 모세가 그렇게 했고, 우리 모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왜 많은 분들이 ‘중보기도 해야 되겠다.’ 하는데 왜 오래 못가는 줄 아세요. 결단을 가지고, 각오를 가지면 한 일주일은 갑니다. 그런데 2주 3주 못갑니다. 한 달 두 달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일 년, 이 년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안됩니다. 우리의 노력만 가지고 안됩니다. 그럼 언제 가능하냐? 주님이 여러분에게 그분의 아름다움을 조명해 주셔서 그분 앞에 서는 그 자체만 하더라도 나의 특권이고, 나에게 기쁨이고, 그 안에서 주님과의 누리는 교제가 나의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것임을 성령의 조명으로 깨닫게 돼야 그게 가능합니다. 이건 성령님이 비춰주셔야 되지 설교 들어서 되는 게 아니고, 성경 읽어서 되는 게 아니고, 그러한 삶을 산 사람들의 신앙서적을 읽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결국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조명해 주셔야 됩니다. 그것이 되어지면 그분 앞에 서게 됩니다. 다른 아무 것도 없어도 그분 앞에 서면 그것이 기쁨인, 왜냐면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그분 앞에 나가는 그 자체만 하더라도 기뻐하심을 알기 때문에 서게 됩니다.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 어떤 두 분의 사는 삶을 통해서 거룩한 생활이 단순한 의무가 아니고, 단순히 해야 할 짐스러운 것이 아니고, 그 거룩한 삶 자체가 얼마나 우리에게 특권이요 기쁨이요 아름다움인 것을 더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조명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항상 그런 마음 가운데 있으면 좋지만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비춰주실 때, 진실로 하나님 앞에만 있기를 원하는 열망이 생기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항상 자동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성령 안에 있어야 됩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이 저에게 아버지 되심을 알려주셨던 부분, 그리고 내 아버지의 사업이 내 사업이라고 알려주셨던 부분, 그 외에도 몇 가지 기도제목들이 있습니다. 제가 그 기도제목들만 봐도 속에서부터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셨던 부분들이니까요. 이 부분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조명해 주셨던 부분들을 제가 묵상하기만 해도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기를 더 원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분의 그 임재가 충만할 뿐만 아니라 그분이 더 소중하고 아름답고 그분에게 더 가까이 가길 원하게 되는지, 이 모든 것들이 성령의 조명으로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한다. 그것은 십자가의 공로가 어떠하며,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루신 것이 어떠하며, 그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함으로 나의 모든 의가 벗겨지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가르침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성령의 조명으로 여러분에게 깨달아져야 그렇게 설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 십자가지신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비춰져야 그게 가능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기도제목들이 성령님께서 함께하실 때는 그것이 선명하게 마음속에서부터 있습니다. 그러나 저도 그렇지 않으면 그게 그랬었는데, 그렇게만 남아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알고, 그분을 아는 만큼 신뢰할 수 있고, 그만큼 능력과 은혜와 거룩함과 그러한 하나님의 모든 신성이 우리에게 넘치게 되는데,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주님만을 알기 원했는데, 이렇게 주님을 알고 의지하려면 성령님의 조명이 필수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게 이겁니다. 잘 들으세요. 성령님의 조명을 위해서 여러분에게 중요한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게 뭐냐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겁니다. 그게 오늘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사람들에게 칭찬을 구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복음에 대해서
본문: 갈라디아서 1장 1-10절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5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강의하면서 복음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성경 중에서 복음의 진리를 가장 잘 말해주고 있는 책 중에 하나가 바로 갈라디아서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책이 로마서이기도 합니다. 물론 고린도전서도 매우 중요하고, 다른 서신서들도 다 중요하고 다른 모든 성경책도 중요합니다.
앞으로 갈라디아서 전체를 쭉 살펴보면서 믿음으로 서는 삶, 주님의 십자가만 의지하는 삶, 주님 안에 거하는 삶, 혹은 주님이 내안에 거하는 삶, 주와 동행하는 삶, 날마다 삶속에 주님의 승리를 경험하는 삶, 이러한 부분들을 살펴보면서 여러분이 실재로 그것들을 경험하고, 배우고, 그 안에 서게 되는 그러한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제가 한 구절 한 구절 성경공부 식으로 가르치기보다는 그러한 삶에 대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부분들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갈라디아서도 다른 서신서와 마찬가지로 먼저 사도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고, 문안하고 있지만, 곧바로 그 당시 문제가 되었던 율법주의 신앙인 거짓복음에 대한 부분으로 직접 들어가고 있는데, 우리가 오늘 이 부분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사도 바울은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의지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바울은 먼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으로가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볼 때,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능력을 그의 삶에서 실재로 의지하고 살았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하는 것을 여러분이 이론적으로 믿는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능력을 실재로 삶에서 의지하고 사는 것과는 매우 다른 차원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도 고난을 당합니다. 실재로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고난이 끝나는 게 아닙니다. 고난이 더 올 수도 있습니다. 사단은 여러분을 시기합니다. 한 예로 여러분들이 그동안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었는데, 정신 차리고 이제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지 하고 주님 앞에서 잠잠히 기다리고, 주님을 가까이 하고, 주님을 더 사랑해야지 하면 환경이 좋아지는 게 아니고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영적전쟁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을 보시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에베소에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큰 환난을 당했습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그런데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서 또한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자신이 받은 위로로 위로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 주변에 어떤 사람이 고난을 당합니다. 그래서 옆에서 ‘참으세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런 위로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 있습니다. 다 맞는 말이고 정답인데도 그 사람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이론이니까요. 그런데 여러분이 매우 큰 고난을 당했을 때, 그 가운데서 주님이 주는 능력을 발견하고 믿음으로 그 고난을 이겼다면, 그때는 그것을 나누면 그건 매우 대단한 힘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치유하고, 상대방을 회복시켜 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큰 고난을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당했는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사 자기에게 먼저 하나님의 위로가 넘쳤을 뿐만 아니라 고난을 당한 자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더 말하고 있습니다.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영어성경에 보면 더 잘 나와 있습니다. “We were under great pressure, 우리는 큰 압박 가운데 있었다. far beyond our ability to endure, 견디는 우리의 능력을 훨씬 초월하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압박을 받았다. so that we despaired even of life. 그래서 우리는 심지어 우리의 목숨까지도 포기했다. 9 Indeed, 실재로 in our hearts 우리 마음속에서 we felt the sentence of death. 우리가 죽음의 선고를 느꼈다. 그러면서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그러나 this happened 이 일이 일어났다. that we might not rely on ourselves but on God, who raises the dead.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곧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뢰하도록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사도 바울도 이 사건을 통해서 더 배운 겁니다. 뭐를 배웠냐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실재로 삶에서 의뢰하는 것을 배웠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 그분 믿어요. 그 말하고는 전혀 다른 겁니다. 이것은 그의 삶에서 실재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을 고난을 통해서 배웠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살리신 그 부활의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이러한 환난을 통해서 실재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배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이 그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도 바로 그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 위에 서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15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그러면서 기도하는 내용이 17절부터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성령(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데, 성도들로 하여금 마음 눈이 맑혀져서 그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원한다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3장에서도 또 기도하고 있습니다.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여러분이 구하는 모든 것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그 모든 것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그 능력이 여러분 가운데 지금 행하고 계시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게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너희가 깨닫게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부활의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실재로 삶에서 배웠듯이 에베소 교회가 그들 가운데 지금 역사하시는 그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 능력을 의지하고, 그 능력을 신뢰하고, 그 능력의 하나님을 믿도록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인데, 빌립보서 3장에서도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사도 바울은 그의 사역의 종점인 로마 옥중에 갇혀있는 그 시점에서도 예수님을 더 알기를 원했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더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단순한 이론이 아닌 실재로 우리의 삶에서 그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고난을 통해서 배우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 나가면서 배우게 됩니다.
둘째,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
부활의 능력과 같이 가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 둘이 같이 가야 합니다. 빌립보 3장에서 나왔듯이 사도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그러면서 복음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영어성경에는 다른 복음에 “”표가 되어있는데, 그 당시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른 복음을 좇아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과 다른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실재로는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습니다.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여기 ‘요란케 하여’ 라는 말을 영어성경에 보면 Evidently some people are throwing you into confusion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혼돈 가운데 집어넣는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실재로 다른 복음이 있는 게 아니고, 그것은 거짓 복음인데 혼돈 가운데 들어가는 것뿐이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여기에 ‘변한다.’ 말도 영어성경에 보면, are trying to pervert the gospel of Christ.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 함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복음’이라는 말은 혼돈 가운데 빠뜨려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는 거짓 복음인 것을 말합니다. 다른 복음이란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에는 심판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래서 거짓복음에는 매우 심각한 저주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복음’ ‘거짓복음’을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율법주의 신앙인데, 사도 바울은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그렇게 말했는데,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사도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동시에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뭐냐? 간단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7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의 지혜로 전하면 그 능력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바로 그 다음 절에 보면,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러면서 22절입니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바로 이겁니다. 복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이론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복음은 인격체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인격체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진리가 아니고,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이 아니고,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이었습니다. 그분이 능력이고, 그분이 지혜입니다. 또 30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이론이 아니고, 어떠한 사실이 아니고, 어떠한 사건이 아니고, 어떠한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혜가 되시고 예수님이 의로움이 되시고 예수님이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십니다. 아멘,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라고 했습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십자가에서 능력이 소멸되지 않기 위해서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십자가의 도란 앞에서 말한 대로 십자가에 관한 이론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간단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능력이요. 그 예수님이 지혜요. 그 예수님이 거룩함이요. 그 예수님이 구속함이요. 그러기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2장을 보십시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헬라어는 ‘남성과 중성’ 중에 어는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지는데, 밑줄 친 부분이 헬라어에는 남성과 중성의 어미가 똑같습니다. 그런데 영어성경은 밑줄 친 부분을 다 남성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앞 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 외에는” 이렇게 보는 게 훨씬 옳습니다. 그래서 N.I.V 성경에는 “2 For I resolved to know nothing while I was with you except Jesus Christ and him crucified. 내가 너희 가운데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시니까요. 그분 자체가 우리에게 부활이고, 그분 자체가 우리에게 능력이고, 그분 자체가 우리에게 지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분을 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먼저 그분을 진실로 알기 원했습니다. 왜냐면 그분을 알아야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이론을 말한다면 그는 벌써 다 띄었고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에게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면 자기들은 벌써 다 띈 거라고 생각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복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복음은 인격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이론적인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에게 능력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고, 그분이 지혜가 되고, 그분이 구속함이 되고, 그분이 거룩함이 됩니다.
골로세서 1장 27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다른 말로 하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을 전했는데, 그 하나님의 비밀은 복음의 핵심 결정체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한마디로 줄이면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분이 바로 우리의 영광의 소망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능력이고, 예수님이 지혜고, 예수님이 구속함이고, 예수님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예수님이 여러분의 영광의 소망입니다. 여러분의 영광의 기초입니다. 여러분의 영광의 근거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그러면서 2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보십시오. 예수님을 전하고 그분을 만나게 될 때 사람이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론을 듣고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 골로세서 2장 6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러면서 8절을 보세요.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여기서 헛된 속임수란 사람의 전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세상의 원칙과 원리들을 좇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인데 혹시 헛된 속임수가 뭔지 아시겠어요? 그에 대한 답변은 그 아래 16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여기에 먹고 마신다는 말은 그 당시에는 시장에서 파는 모든 고기들은 이방인의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난 후 시장으로 나오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들 간에 먹는 것 때문에 서로 알력이 있었습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안먹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그랬냐면, ‘저 믿음 없는 것들,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감사함으로 먹으면 되지’ 이렇게 말했고, 안먹는 사람들은 뭐라고 그랬냐면, ‘저 타락한 것들, 고기가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다 먹어’ 이렇게 서로를 비방했습니다. 신앙적인 면을 말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절기가 나오는데, 모든 절기를 다 지키는 겁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사순절, 부활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등 입니다. 그리고 월삭은 매월 첫날을 말하는데, 그 당시에는 매월 첫날에는 특별한 예배를 드린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란 겁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잘 들으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는 아무런 절기도 지킬 필요가 없다. 그 말인가? 아닙니다. 바로 그 다음 17절에 보면 답이 나옵니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우리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의식들은 그림자이고 몸(실재)은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앞에서 얘기 했듯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이론이 아니라 인격체이신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본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의 본질을 위해서 지금 언급된 것들은 모두가 이 본질을 표현하는 하나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그럼 철학과 세상초등학문이라는 말은 뭐냐? 여러분이 이 신앙의 본질인 예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 사도 바울이 그림자라고 말하는 외부적인 절차(의식)들을 잘 지키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유전(전통)을 따르는 것이고, 철학과 세상초등학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생명도 없습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다. 그분을 아는 만큼 우리는 변화됩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여러분이 주일 예배를 나오면서 우리 위에 십자가에 달린 그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더 알기 원하고, 주님을 더 알기 원하여 그 가운데 서기 원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원하고, 주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나오기를 원해서 오셨다면 그것이 귀한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니라 주일날은 빠지면 안되지, 성수주일은 온전히 지켜야 돼, 그래서 우리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예배에 참석하여 그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는 자세로 여기에 와 있으면, 이것은 인간의 전통을 따르는 것에 불과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주일을 지키는 거라도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느냐에 따라서 유전(전통)을 따르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그러면서 9절을 보세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성품의 모든 충만함이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주님을 전하고, 그 주님을 알고, 그 주님을 사모하고, 그분을 더 알기를 열망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의지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진실로 알기 원했습니다. 그 십자가의 능력 위에 서기 원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이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님을 더욱 알고, 그 십자가의 그 공로를 더 깨닫기 원하고,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그 하나님의 권능과 역사를 더 알기 원하고, 그래서 그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주님 앞에 서는 것을 그가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놀라운 승리가 있었고, 이러한 삶을 위해서 하나님께 예배도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고, 헌금도 드리는 것이고, 여러 가지 외부적인 것들이 있었던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20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문자를 외부적으로 지키는 것을 우리의 신앙의 본질로 아는 그것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제 얘기는 뭐냐면 어떠한 것을 의식적으로 먹고 안먹느냐에 우리의 신앙의 본질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본질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고, 그분을 믿는 것이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구별할 것을 구별하고, 버릴 것은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22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결국 전통적으로 의식을 좇는 것에 불과하다 그 말입니다.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자기가 스스로 숭배하는 거라 그 말이지요. 종교적인 모양은 매우 귀할 수 있습니다. 겉모양을 보고 그 사람 매우 신앙 좋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자의적인 겸손은 진정한 겸손이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서 고개는 많이 숙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여기 나와 있는 것처럼 이러한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는 절대로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와서는 매우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는데 돌아가서는 전혀 안믿는 사람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되어있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신뢰하고, 주님을 알게 될 때, 주님이 우리의 능력이 되시고, 주님이 거룩함이 되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서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고, 주님 안에서 더욱 더 충만한 데까지 자라기 때문에 주님을 아는 데서 우리 삶이 변화되는 것이지 외부적으로 종교적 모양을 잘 갖춘다고 해서 절대로 변화의 능력이 없습니다. 거기에 육신을 이기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자의적인 예배와 임의로 하는 겸손에 불과하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을 봅니다.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여기 개들은 멍멍 개를 말하는데 실재로 개를 말하는 게 아니고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팔 일 만에 할레를 받았다는 말은 자기는 진짜 유대인이란 말입니다. 미국가면 외국에서 이민을 와서 미국 시민권자 받은 자가 있고,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권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헨리 키진저는 하버드대학원 정치학 박사요 교수를 지냈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요 미국 국방장관까지 지낸 매우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왜 미국 대통령에 못 나오는지 아세요? 그것은 그가 미국에서 안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미국 법에는 미국에서 태어나야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옛날에 박정희 시대는 어느 고등학교를, 전두환 시대는 어느 고등학교를, 노태우 시대는 어느 고등학교를, 김영삼 시대는 어느 고등학교를, 김대중 시대는 어느 고등학교를 나온 게 귀공자고...(출세와 관련) 이런 얘기가 많았습니다. 베냐민 지파라는 말은 유대인의 초대 왕이 베냐민 지파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그 당시 바리세인들이 율법을 가장 철저하게 지키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인정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한국에는 총신대 나오면 가장 훌륭한 신학교 나왔다고 목사님들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데, 바울은 이것들을 육체를 신뢰하는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내가 어느 신학교 나왔는데, 내가 지금 어느 교단에 속했는데, 우리 교단이 장자 교단인데, 내가 지금 어느 교회를 나가는데, 지금 우리 교회는 성도가 몇 명인데, 우리 교회는 예산에 얼마인데, 내가 지금 총회장인데, 이것들이 육체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이라는 말은 그 얘기입니다. 그리고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을 개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심하게 말하는 게 아니고 지금 성경이 하는 말입니다. 육신을 자랑하는 자들을 개라고 말합니다. 전에는 사도 바울을 사람들이 알아주었습니다. 왜냐면 그는 대단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그게 아니고 뭐냐?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가 복음을 깨닫고 나니까. 예수님을 경험하고 나니까. 그게 다 배설물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손해를 끼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분을 만나고 나니까 세상에서 잘 알아주는 종교적인 배경들, 이거는 통(배설물)에 불과하다. 그 말입니다. 그것을 의지하는 것은 똥을 의지하는 겁니다. 가슴에 똥으로 만든 훈장을 붙이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영적으로 소경인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그것들이 대단해 보이겠지만, 그래서 그것들을 자랑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똥으로 만든 훈장을 달고 다니는 겁니다. 내가 성경을 몇 번 읽었는데, 성경을 몇 번 읽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육체의 자랑을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 똥으로 여겨 다 버렸다고 말합니다. 왜냐면 주님을 아는 것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그리스도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발견되는 게 오직 믿음으로 간능하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서 1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알기 원한다. 내가 그 부활의 권능을 알기 원한다. 그리고 내가 그분과 함께 고난에 동참함도 알기 원한다.” 제가 지금 몇 가지 성경구절을 살펴봤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이요. 하나님의 모든 신성이 그 안에 다 있고,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그 안에 다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만큼 그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신뢰함으로만 그분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분이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분을 전할 뿐만 아니라 바로 자신이 먼저 그분만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적인 것들은 예수님을 알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인 예수님을 알기보다 종교적인 행위와 의식들을 의지하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삼을 때, 그것을 신뢰하게 될 때, 그들을 개들이라고 말합니다.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변질하는 겁니다. 이것이 세상의 초등학문이요 철학이라고 말하고 있고, 인간의 속임수라고 말하고 있고, 전통을 따르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의지했고요. 십자가지신 예수님을 전하고 의지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부활의 주님을 의지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냐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게 필요합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성령님의 조명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제가 아무리 가르쳐봐야 되지 않고, 저도 개인적으로 아무리 배워도 되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저에게 조명해 주셔야 압니다. 제 수첩에는 제 개인적인 기도제목들을 적어놓은 게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그 기도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제 깊은 속에서부터 기도가 나오는 것을 느낍니다. 왜냐면 제가 임의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비춰주셨던 부분들을 써놓은 것이니까요. 그중에 하나는 모세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갖기를 원하는 겁니다. 하나님 영광 가운데 들어가는,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 서되 우리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서기 원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에게 어떤 부분을 비춰주셨느냐 면, 하나님 앞에 제가 섬기는 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를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기도하러 그분 앞에 서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을 조명해주셨습니다. 실재로 모세가 그렇게 했고, 우리 모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왜 많은 분들이 ‘중보기도 해야 되겠다.’ 하는데 왜 오래 못가는 줄 아세요. 결단을 가지고, 각오를 가지면 한 일주일은 갑니다. 그런데 2주 3주 못갑니다. 한 달 두 달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일 년, 이 년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안됩니다. 우리의 노력만 가지고 안됩니다. 그럼 언제 가능하냐? 주님이 여러분에게 그분의 아름다움을 조명해 주셔서 그분 앞에 서는 그 자체만 하더라도 나의 특권이고, 나에게 기쁨이고, 그 안에서 주님과의 누리는 교제가 나의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것임을 성령의 조명으로 깨닫게 돼야 그게 가능합니다. 이건 성령님이 비춰주셔야 되지 설교 들어서 되는 게 아니고, 성경 읽어서 되는 게 아니고, 그러한 삶을 산 사람들의 신앙서적을 읽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결국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조명해 주셔야 됩니다. 그것이 되어지면 그분 앞에 서게 됩니다. 다른 아무 것도 없어도 그분 앞에 서면 그것이 기쁨인, 왜냐면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그분 앞에 나가는 그 자체만 하더라도 기뻐하심을 알기 때문에 서게 됩니다.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 어떤 두 분의 사는 삶을 통해서 거룩한 생활이 단순한 의무가 아니고, 단순히 해야 할 짐스러운 것이 아니고, 그 거룩한 삶 자체가 얼마나 우리에게 특권이요 기쁨이요 아름다움인 것을 더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조명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항상 그런 마음 가운데 있으면 좋지만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비춰주실 때, 진실로 하나님 앞에만 있기를 원하는 열망이 생기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항상 자동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성령 안에 있어야 됩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이 저에게 아버지 되심을 알려주셨던 부분, 그리고 내 아버지의 사업이 내 사업이라고 알려주셨던 부분, 그 외에도 몇 가지 기도제목들이 있습니다. 제가 그 기도제목들만 봐도 속에서부터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셨던 부분들이니까요. 이 부분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조명해 주셨던 부분들을 제가 묵상하기만 해도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기를 더 원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분의 그 임재가 충만할 뿐만 아니라 그분이 더 소중하고 아름답고 그분에게 더 가까이 가길 원하게 되는지, 이 모든 것들이 성령의 조명으로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한다. 그것은 십자가의 공로가 어떠하며,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루신 것이 어떠하며, 그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함으로 나의 모든 의가 벗겨지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가르침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성령의 조명으로 여러분에게 깨달아져야 그렇게 설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 십자가지신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비춰져야 그게 가능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기도제목들이 성령님께서 함께하실 때는 그것이 선명하게 마음속에서부터 있습니다. 그러나 저도 그렇지 않으면 그게 그랬었는데, 그렇게만 남아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알고, 그분을 아는 만큼 신뢰할 수 있고, 그만큼 능력과 은혜와 거룩함과 그러한 하나님의 모든 신성이 우리에게 넘치게 되는데,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주님만을 알기 원했는데, 이렇게 주님을 알고 의지하려면 성령님의 조명이 필수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게 이겁니다. 잘 들으세요. 성령님의 조명을 위해서 여러분에게 중요한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게 뭐냐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겁니다. 그게 오늘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사람들에게 칭찬을 구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출처 : 발의 무리
글쓴이 : 모퉁이 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