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영적도해
최바울 지음
펴내기 / 2005년 10월 / 280쪽 / 11,000원
1. 하나님의 사정
세계에는 그 수를 다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그 중 대부분은 잡신이지만 더러는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신들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많은 신들 중에 어떤 신이 진짜 참신이냐는 것입니다. 어떤 신이 인간에게 “나를 경배하라”고 요구하려면, 그 신은 그럴 만한 신의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능력, 즉 파워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신이 힘은 엄청나지만 선하지 않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한 신 앞에 영원히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존재가 소멸되는 것이 나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배하기에 합당한 신은 ‘능력’과 함께 ‘선함’을 가진 신이어야 합니다.
감성과 영성의 원초적 기능이 마비되어 버린 현대인들은 소위 영적 민감성이 떨어져 신들을 가깝게 느끼지 못하지만 원시 시대에는 사람들이 신들과 교감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신에 관한 이야기가 보편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면 신이 나타나서 이야기한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신이 어떤 신인지 검증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불꽃 속에서 타지 않는 떨기나무 가운데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모세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신이 다른 잡신과는 전혀 다른 신이라는 것을 감지합니다.
드디어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와 그 백성들에게 당신이 누구신지 공개하기 시작하십니다. 애굽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 두 민족이 보는 앞에서 그것도 세계 대제국 애굽의 중심에서 신들이 충돌했고,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세계제국 애굽신을 압도합니다. ‘파워 인카운터(power encounter)'가 벌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상황을 목도하며 분명히 알게 됩니다. “여호와 신, 그분은 세계제국의 어느 신보다도 더 크신 분이구나!”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유대인들은 이것을 목도하고 흥분합니다. 그리고 모세를 따라 담대하게 출애굽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심’과 ‘거룩하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실 뿐 아니라, 죄가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어두움이라고는 한 점도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 이후 시내산에 강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성결케 하라. 내가 돌격할까 하노라”고 경고하십니다. 빛은 어두움을 공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거룩하신 분을 죄인인 인생들이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직접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완벽하게 당신의 선함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세상 어느 신이 자기를 신앙하는 인생들을 위해서 희생합니까?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하나님이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전능자시며 선한 신인 것을 완전하게 증명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에 무슨 문제나 훼손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인간 창조가 필요했을까요? 우리는 에덴 동산의 타락 사건을 보면서 그 사정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단이 에덴에 침입함으로써 아담과 하와가 결국은 범죄하게 됩니다. “너도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는 사단의 도전은 하나님의 권위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게 “너도 하나님이 돼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꼬임에 넘어가 버립니다. 사단의 승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 부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숨어 있던 아담이 대답합니다. “제가 벗었으므로 두려워서 여기 숨었나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또 물으십니다. “너희의 벗었음을 누가 네게 고하였느냐?” 놀라운 일입니다. 주님은 배후를 찾고 계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배후를 아십니다. 그러나 아담에게 배후를 지목하여 입술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고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여기에 하나님의 사정의 맥락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고백을 들은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의 잘못을 추궁하시지 않고 즉각 뱀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뱀에게는 배경이나 배후를 묻지 않습니다.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저주를 받아라!”고 단호하게 저주를 명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범죄한 사단을 영원히 저주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고소에 따라 하나님은 합법적으로 사단을 정죄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사정이 풀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저주하신 후에 범죄한 인간을 구원할 방법에 대해 즉각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오셔서 사단을 멸하고 인간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 죄를 고백하고 주께 나오기만 하면 그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사해 주시겠다고 하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으십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의 결과는 저주가 아니라 고통이었습니다. 범죄하면 우리는 고통을 당하게 되나 하나님께 나아오면 우리를 용서하시고 깨끗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로 그 ‘여자의 후손’이 지금부터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그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이 직접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가히 상상할 수 없는 패러독스입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패러독스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인생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적인 패러독스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사단의 정사와 권세를 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처음부터 패러독스로 일관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정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진리의 성령님이 오시면 하나님의 심정을 갖게 됩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우리는 에덴 사건과 이후의 일관된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분명히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원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단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영의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영의 일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머리를 재기불능으로 상하게 하셨지만 어둠의 세력은 그 권세가 꺾였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인생들을 속이고 유혹하면서 우는 사자들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단을 대적해야 합니다. 이제 주께서 재림하시면 사단은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과 함께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얻은 우리를 즉시 천국으로 데려가시지 않고 이 땅에 남겨 두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는 운명주의적이지만 우리의 신앙은 종교가 아닙니다. 삶이요, 실체요, 영적 전쟁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뒤로 하고 모호한 종교적, 신학적 용어만이 난무하는 요즘, 신자들은 신학적, 지적 체계와 교회 운영의 시스템 속에서 영성을 잃어버리고 나약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체계화된 지식과 신학은 없었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어 갔습니다.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초대교회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도의 권세는 회복되어야 합니다.
2. 사단의 세계경영
창세기 4장 1-17절을 보면 옛 뱀 사단이 어떻게 인생을 경영하는지, 어떻게 세계를 경영해 가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 사건 이후 사단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가인에게 살인을 시킨 것입니다. 가인은 사단의 도구가 되어 최초의 살인자가 됩니다. 문제의 발단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겸손히 하나님을 예배했으나 가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아벨을 시기했고 다음은 안색이 변하여 하나님께 분노했습니다. 이처럼 사단의 수법은 늘 동일합니다. 첫째는 시기하게 하고, 다음은 하나님께 불평하게 하고, 마지막으로는 사람에게 범죄케 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경고했으나 가인은 반성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주님은 마지막 경고를 하십니다. “죄가 네 문 앞에 엎드러질 것이다. 그러나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할 것이다.” 죄가 공격해 오고 사단이 공격해 오더라도 하나님은 가인을 보호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사단에게 몰려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오셔서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퉁명스럽게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죄를 고백하고 배후를 밝히며 나오기를 바라셨지만 완악한 가인은 이번에도 실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핏소리가 호소한다고 말씀하시며 “네가 유리하며 방황할 것이다.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합니다. 그러자 가인은 두려워 떨며 살려 달라고 애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하셨던 것처럼 즉시 살려 주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며 “너를 해한 자는 7배의 벌을 받을 것이다”라는 우주적인 선포를 하십니다. 이전의 엄하심을 일순간에 감추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경계와 한계가 없으십니다. 단, 조건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이것마저도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보호하심에도 불구하고 홀로 선 가인이 제일 처음 한 것은 성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자기의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가인처럼 행합니다. 미래가 두려워서 돈으로, 권력으로, 또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자기의 성’을 쌓는 것입니다. 내가 성을 쌓으면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나의 미래를 책임지십니다. 그러나 결국 가인의 후손은 계속 성을 쌓아 가면서 세계문명을 건설해 갔습니다. 성은 현대적 의미로 하면 ‘도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문화와 문명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화는 힘(power)이 없습니다. 문화(culture)는 ‘경작하다(cultivate)'라는 단어에서 파생한 것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사람이 노력해서 경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창의성을 발휘해서 얻어 낸 모든 것을 문화라고 합니다. 즉, 자연계 내에 구별된 인간계를 문화 영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유형 및 무형의 모든 것‘을 문화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문화적 수준‘은 논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문화는 형태만 다를 뿐 문화적 수준은 동일합니다. 이것을 ’문화의 상대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문명은 다릅니다. 문명은 자연계 내에 인간계, 즉 문화의 영역 안에서 도시화된 부분을 말합니다. 문명(civilization)은 도시(city)라는 단어와 어근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문명은 도시화된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기술을 통해 도시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화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지만, 문명은 힘이 있습니다. 여기서 힘은 테크놀로지, 즉 기술의 힘을 말합니다. 기술에는 테크놀로지와 테크닉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테크놀로지는 과학적 기술을, 테크닉은 정치적 혹은 종교적 기술 등을 말합니다.
세계는 오랜 역사 동안 발전과정을 거쳐 두 문명을 낳았습니다. 하나는 물질문명이고 또 하나는 정신(종교)문명입니다. 최근에 세계는 두 문명의 갈등과 대결로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현재 서구 기술문명과 이슬람 종교문명 사이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해 있습니다. 서로 힘이 있기 때문에 충돌하는 것입니다. 이슬람 종교문명은 과학 기술의 힘은 없지만 종교적 테크닉으로 엄청난 힘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종교나 정치는 다 테크닉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인간 사회 집단을 조직하면서 큰 힘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은 도시문명을 건설했고 그로부터 인류문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명은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 성을 쌓으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가인의 후예들은 집단을 이루어 그 유명한 바벨문명을 건설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계 영적전쟁의 핵심 주제가 문명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벽돌 굽는 기술을 발명한 그들은 어느 날 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술이면 이제 그들이 자신들을 보호할 거대한 성을 쌓을 수 있겠다고 자만했던 것입니다. 위대한 바벨문명을 건설하자며 분주히 그리고 열심히 일을 합니다. 이들이 이처럼 문명을 건설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적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한심한 인생들에게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언어를 혼잡케 해서 의사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을 복잡하게 하심으로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세계 언어의 분화, 즉 언어 발달은 음운이 체계적으로 대응관계를 가지면서 변화하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시스템을 한순간에 붕괴시켜 버리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한 공동체 내에서 리더가 되는 사람이 하나님의 비전이나 뜻을 생각지 않고 자기 성을 쌓기 시작하면 의사소통이 마비됩니다. 그리고 끝내는 공동체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성령 안에서 각기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 사이에 의사소통이 이루어진 것과는 정반대 현상입니다.
3. 하나님의 세계경영
하나님은 바벨문명 사건 이후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으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적극적이면서 영적인 방법으로 세계를 경영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일이 완성되면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사단을 영원히 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경영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자까지 아끼지 않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감동하여 두 가지 맹세의 약속을 하십니다.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것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적의 문’이란 세상을 장악한 거대문명의 도성들로, 여기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축복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세계경영의 핵심 전략을 다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전략적 계시를 예수님께서는 ‘유언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그리고 마침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께서는 오순절에 강림하셔서 ‘모든 민족’의 언어와 방언으로 직접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이것이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를 위해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라는 시험을 받고, 예수님께서도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시고 축복하실 때에는 먼저 통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시험의 모형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즉 경제적 시험입니다. 둘째, “네가 뛰어내려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서 받쳐 줄 것이다.” 즉 하나님과 동등한 종교권력을 말합니다. 셋째, “나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주리라.” 이것은 사회 정치적 권력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도전이 바로 고대 바벨론 이후에 형성된 고대 신들의 권력입니다. 고대의 주요 신들, 즉 정치권력을 장악한 이집트 태양신,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신, 팔레스타인의 농경신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대로부터 사단은 세 종류의 신으로 변신하고 분화하여 인류의 문명을 이끌어 왔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 세계를 보면, WTO(세계무역기구)로 상징되는 경제권력과 G7으로 대변되는 정치권력을 통합한 서구문명과 종교권력을 가진 이슬람문명이 지구적으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시대에 사단의 권력들이 상호 충돌하면서 공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지구적 양상이 어떻게 변화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계시록 18장 후반부에 나타난 것처럼 문명의 권력들이 상호 격돌함으로써 사단의 세계는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문명의 권력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문명의 중심에서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문명의 중심은 강력하고 견고한 시스템이 작동하기 때문에 거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문명의 흥망성쇠를 볼 때, 문명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곧 그 문명의 역사가 끝나간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문명이 힘으로 부상하는 순간, 새로운 대안이 다른 변방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역사는 그곳 변방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변방이 문명의 중심이 되면 역사의 중심축은 다시 다른 변방으로 이동합니다. 문명의 중심과 역사의 중심은 공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 즉 history makers는 문명의 중심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역사의 대안이 시작되는 변방을 향해서 갑니다. 새로운 역사는 거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4. 마지막 세계 영적전쟁
구약 다니엘서 12장은 마지막 시대의 현상들, 즉 바로 이 시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함께 보며 핵심 개념을 가지고 이 시대를 영적으로 도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 계시된 짧은 말씀만으로도 마지막 시대가 어떻게 될 것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는 환난이 있을 것이며 점차 갈수록 환난이 깊어질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는 염소와 양, 알곡과 쭉정이가 분명히 드러날 거라고 했습니다. 환난이 있으면 진짜와 가짜가 구별됩니다.
또 마지막 시대는 지혜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 왜냐하면 마지막 시대는 어둡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갈 길을 잃고 선과 악을 혼동하게 되며 거짓 선지자들이 난립하여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분별할 능력들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때는 지혜자가 리더십을 발휘하는 시대입니다. 지식정보 시대도 잠시 지나갑니다. 지식(knowledge)이 아니라 지혜(wisdom)가 절실합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마지막 시대의 지구적인 현상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빨리 왕래한다’는 것은 바로 ‘속도’를 말하며 이 시대, 곧 세계화 시대, 글로벌 시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지식이 더하리라’는 것은 지식정보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는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대되는 시대이며 세계가 급속히 좁아진 스피드 시대입니다. 세계는 무서운 속도로 통합되고 시스템화되면서 갈수록 사람들이 시스템에 종속되어지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자유로운 ‘자율 영역’이 점차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현상은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함께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본주의자들 및 자유주의자들은 테크놀로지를 선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류의 미래를 아름답게 하고,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테크놀로지는 가치중립적이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죄인인 인간은 그것을 늘 악한 형태로 사용해 왔습니다. 인본주의자들은 이 땅에서 유토피아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들의 모든 교육은 이러한 인본주의에 기초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말세가 가까워올수록 허다한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하고 적그리스도의 핍박이 가시화됩니다. 다니엘서 12장 7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에 있는 자가 그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생하시는 자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지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말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곧 지혜입니다. 마지막 시대가 될수록 지식정보의 도덕성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될 것입니다. 지식정보의 가치를 분별할 능력이 필요합니다. 현대사회는 상대주의가 팽배해지면서 가치중립을 추구하는 경향이 날로 더합니다. 포스트모던 사회가 도래하면서 다원주의 논리가 보편화되고 있고 가치중립을 넘어 무규범 현상이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시대는 자신을 정결케 하는 사람들과 더욱더 악해지는 사람들로 뚜렷하게 양분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는 적그리스도인 짐승이 등장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폐할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고 유대인들이 그렇게 소원하며 기다리던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복원될 것이지만, 그러면 곧이어 그 성전에 적그리스도, 즉 가증한 것이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 것은, 그렇게 되면 즉시 주께서 재림하시어 적그리스도를 파하고 승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고난의 날수는 분명합니다.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서 분명히 말씀합니다. “높아진 모든 이론을 파하고 모든 생각(사상)을 바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나니” 그런데 이 말씀을 알면서도 지난 수백 년 동안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크게 실수한 것이 있습니다. 세계를 지배했던 두 이데올로기, 사회주의 사상과 자유주의 사상이 지구촌에 우뚝 높아져서 세계를 두 진영으로 나누어 지배할 때, 세계교회는 두 개의 사상 중 하나를 택하여 그것이 최고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높아진 이론과 사상의 제자들이 되어서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엄청난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세계는 지적으로 체계화된 세계관, 즉 이데올로기를 가진 리더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근대 시민교육의 컨텐츠를 만들고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까지, 그 이데올로기의 틀 안에서 국가의 힘을 동원하여 국민들을 교육하는 것입니다. 실로 엄청난 세력입니다. 인간들은 철저하게 세뇌되어 가고 집단적으로 개조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은 물론이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에 대해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지구촌에 높아진 모든 이론을 파하고 높아진 모든 사상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 31-32).
5. 팍스 아메리카나
지구를 장악한 두 이데올로기의 대결은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일단락되었습니다. 드디어 자유주의가 유아독존인 양 세계를 장악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주의의 정체와 그 비전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과 겉모양이 어떻든 간에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에 대해서 그 실체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미국의 평화,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세계에서 미국의 단독 지배체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세계제국 미국의 지도자들과 엘리트들은 인류공동체의 미래가 경제적 번영과 평화로운 세계 건설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우선 물질의 진보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럴 때 인간이 행복할 수 있고 평안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본격적으로 글로벌 프로젝트를 진행시켰습니다. 첫 번째 전략은 세계를 하나의 시장, 즉 자유경제 체제의 단일시장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상 미국 엘리트들을 포함해 많은 세계 지도자들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인류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불안감과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세계문명이 놀랍게 발달했고 또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데도 지구적인 난제들은 허다하게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환경오염, 오존층 파괴, 빈부 격차 심화, 핵 확산, 에이즈 확산, 민족 분규 심화, 인종 문제, 소수민족 문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들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테크놀로지는 엄청난 속도로 발달하는데 그 속도를 제어할 방법이 없고, 또 그 방향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연구자가 의도한 발명보다 의도하지 않은 발명이 더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테크놀로지가 자가발전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속도 때문에 미래에 대한 예측 능력이 저하되면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가치판단 능력마저 현저히 저하되어 도덕적 아노미 현상을 맞게 되었습니다.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됨과 함께 지구가 갑자기 빅뱅하며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팽배해졌습니다.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인본주의자들이 고안해 낸 처방은 인간 이성을 더욱더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스스로를 계속 업그레이드시키고 발전시키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인류의 미래에 대한 책임의식과 사명감에 충만한 미국의 엘리트들은 지구를 ‘글로벌 무한경쟁 체제’로 재구성해 나가려고 합니다. 드디어 인류 공동체는 끝없이 달리는 트랙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허다한 무리는 경쟁에 지쳐서 트랙 위에 넘어져 있습니다. 기술적 진보는 이루었을지 모르지만 동료와 동료가 무섭게 경쟁하고 이웃과 이웃이 안면 몰수하면서 모두가 모두에게 경쟁자가 되는 세상이 열리고 만 것입니다.
미국 엘리트들의 두 번째 전략은 분쟁과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가 각 국가 단위로 독립성을 가지고 운영되다 보니 국가마다 독특한 토착 가치들이나 토착 종교들이 난무하고, 이러한 특수한 민족적 가치들과 종교적 가치관들이 이웃간에 상호 충돌하면서 전쟁이 끝없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막는 방법은 지구적으로 가치를 통합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가치가 세계를 지배하게 해야 하는데 어떤 가치로 세계를 통합해야 할까요? 미국인들은 그것이 ‘자유’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이 두 가지 전략이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세계지배’라는 미국 엘리트들이 꿈꾸어 온 비전입니다. 소련 해체 이후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거의 독단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출범시킨 것이 WTO입니다. 이 기구는 한시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나중에 명실상부한 세계정부나 세계제국이 등장하면 그에게 권한을 공식적으로 넘겨줄 것입니다. 미국의 엘리트들의 세계 비전은 미국이 세계정부를 주도하거나 세계제국으로 군림하는 것이겠지요. 미국을 위하여?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6. 세계화와 음모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의 토양에서 자랍니다. 자유주의 역시 자본주의가 아니면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자유의 여신이 사람들을 자신의 품으로 유인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본주의에 편승하는 것입니다. 역으로 보면 자본주의는 자유주의를 앞세워 자신의 통치 영역을 지구적으로 확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17장에서 하나님은 자유의 여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자유의 여신 음녀가 경제권력을 장악한 적그리스도 짐승을 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경제 지상주의가 만연하면서 정치 역시 경제에 종속되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제 권력은 그 힘을 사용하여 모든 국가와 개체들에게 자유주의를 집요하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힘을 빌어서 갈수록 자유 영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이미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모두 확보한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경제적 자유주의를 신자유주의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세계를 자유롭고 개방된, 제한받지 않는 하나의 시장으로 만드는 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목표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강자들의 일방주의나 무절제한 폭력도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7. 빈 라덴과 무슬림 전사들
세상에서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주께서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사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입니다. 하나님의 진단은 정확합니다. 부자도 피곤하고 가난한 자도 피곤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청하시면서 안식과 평안의 약속을 하실 때 하나의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즉, 쉼을 얻는 조건은 “네가 내 멍에를 메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자유는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고를 받아야 합니다.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방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보다는 덕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고전 10:23). 덕은 공동체를 전제로 합니다.
1800년대 중반 중동 이슬람 세계는 서구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북부 아프리카와 중동 전체가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당시 무슬림들은 그들을 접하면서 서양 사람들이 도덕적으로나 인간적으로 타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서구문명은 돈, 섹스, 이기주의, 알코올로 타락한 문명이다.” 바로 이들이 빈 라덴의 선진들, 즉 고전적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슬람 종교부흥과 순화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서구문명의 잔재를 없애고 순수 이슬람 공동체로의 복귀운동을 선언하면서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독립투쟁에 돌입했습니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30, 40년대에 한국은 물론 아시아권의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이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50, 60년대에는 아프리카의 국가들까지 독립합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지도적 역할이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후 세계가 미국과 소련 양대 진영으로 나뉘면서 이슬람 국가들은 비동맹 제 3세계 운동의 중심축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은 이스라엘 독립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국제 정치운동을 전개하면서 더욱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슬림 형제단(이집트), 하마스(팔레스타인), 헤즈볼라(레바논), 이슬라믹 지하드(이집트), 자미아티 이슬라미(파키스탄), 알 카에다(중동) 등 수많은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세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1991년에 미국의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무력 공격하고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기지를 설치하자 이들은 무력투쟁으로 급발전하게 됩니다. 이슬람 무장단체들이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고, 10년 후인 2001년 9월 11일, 미국 본토는 이들의 무력공격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빈 라덴과 그의 친구들은 경제력과 군사력, 즉 서구문명의 두 힘의 상징인 세계무역센터와 미국방성을 공격한 것입니다. 그리고 33개국 알 카에다 네트워크를 가동하면서 글로벌 지하드, 소위 이슬람 글로벌 저항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자살 공격에 참여한 무슬림 청년들이나 이 작전을 위해 협조한 무슬림들은 결코 무식한 광신자들이 아니라 대부분 유럽의 일류대학에서 공부한 중동 무슬림 엘리트들입니다. 차세대 중동 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 테러리스트들이 아니라 서구문명에 대한 이슬람 저항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역사적 사명감에 충만한 고급 무슬림 전사들입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을 때 이들은 공개적으로 미국을 향해 “누가 옳은지 토론하자”고 제안할 정도였습니다. 알 카에다의 반미 저항운동은 57개 이슬람 국가들뿐만 아니라 비서구권 국가들에게까지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세계 가난한 나라들의 국민들이 대부분 심정적으로 그들의 편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빈 라덴에 대한 심리적 동조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8. 음녀
1991년 소비에트 체제가 막을 내리자, 고대 그리스 신이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두 얼굴을 가진 짐승’은 자신을 세계의 지배자로 공공연히 선포했는데 그것이 1995년 WTO의 출범입니다. 세계는 자유주의 토양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새롭게 거듭나고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주창한 프랑스 혁명 이래로 세계는 자유냐 평등이냐라는 두 세력으로 나뉘어 상호 경쟁하면서 갈등해 왔으나 자본주의와 합작한 자유주의가 드디어 승리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이후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와 ‘마의 동맹’ 관계를 맺음으로써 역사적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지배 하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무참히 단절되고 파괴되었습니다. 신을 잃어버린 인간은 어두움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으며, 환경 파괴와 인간성 파괴의 결과로 인해 신음하면서 새하얀 고독을 즐겨야만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자유주의는 인간계에서 ‘악의 꽃’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유혹해서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성경에서 말세의 징조로 이미 언급되어 있습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게 될 것”(딤 3:1-5)이라는 것입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이 돈이라는 매개를 통해 표현되면서, 이기주의와 돈을 사랑하는 물질만능주의가 동의어로 사용된 지 오래입니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본래 기독교와는 관계가 없는 사상입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발달한 서구 사상입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각 섬들과 해안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통일국가 건설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각 도시는 지역 특유의 작물을 경작하면서 특산물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함으로써 각 도시 간에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경제적 기반이 사회적 위치와 자유를 보장해 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발단이 됩니다. 그러나 성장하기 시작한 이들 사상은 기독교가 등장하면서 낮은 포복을 하며 숨어야만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령의 역사 앞에서 설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가톨릭 시대에 자유주의 사상은 다소 힘을 얻어 살아나게 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상은 여전히 중세 가톨릭의 스콜라 철학사상에 의해 강하게 거부되었습니다.
마침내 자본주의가 다시 회생하게 된 것은 개신교 종교개혁 이후부터입니다. “노동은 예배다”라고 말한 칼빈의 후광을 입은 자본주의는 더불어 자유주의까지 뿌리를 내리게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독자적 관계를 강조하다보니 자유주의의 원형인 개인주의 및 개체주의 정신이 발달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 혁명 때는 자유주의가 큰 위력을 떨치며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주의의 승리였습니다. 노동자 중심의 제3계급을 의식하다보니 ‘평등’을 붙여넣기는 했으나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당시 신흥 부르주아들은 ‘자유’를 더 크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시민들의 자유를 향한 절규와 부르짖음, 그리고 주문 소리에 그들이 열망하던 ‘자유의 여신’이 급기야 부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유의 여신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 여신은 본래 고대 바벨론의 신이었다가 에게해 신으로 변신하여 서방 세계에 등장했습니다. 이 신은 여신으로서 에게해에서는 시벨라 신으로 불리웠습니다. 시벨라 여신은 자유와 풍요의 신입니다. 이후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아르테미스(Artemis, 아데미) 여신으로 다시 변신하여 그리스와 헬레니즘 세계를 지배해 왔습니다. 아르테미스 여신 역시 자유와 풍요의 여신입니다. 이후 로마제국 시대에는 다이아나 여신으로 변신했다가 예수님 이후 기독교에 침투하기 위해 ‘마리아’ 여신으로 변장하여 오랫동안 중세 기독교에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퇴출되는 듯했는데 프랑스 혁명 이후 또다시 부활하여 1886년 미국에까지 전해졌고 이후 미국은 자유의 여신을 숭배하는 나라로 급속히 변해갔습니다.
바로 이 자유의 여신이 성경에 언급된 음녀입니다. 신약성경 요한계시록 17장에서는 음녀의 정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음녀는 짐승 및 큰 성 바벨론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여자의 이마에 ‘큰 성 바벨론’이라고 쓰여 있다고 했는데, 이는 상징적 표현이며 실체는 역사적으로 세계문명을 이끌어 온 세력으로 이름만 달리 한 자본주의 문명입니다. 이 음녀는 에게해와 지중해의 ‘물’ 위에 있었습니다. “음녀가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 음녀는 열국과 세계를 지배하는 여신입니다. 이 음녀의 뿌리는 바벨론의 앗수르문명으로까지 올라가고, 그 위로는 이전의 지중해 해변에 애굽문명을 건설했던 여신인 이시스(Isis)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시스의 권세는 대단했습니다. 생명과 부활의 강력한 힘을 가진 이 여신을 당시 사람들은 ‘왕들의 창조자’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로부터 여신, 즉 음녀는 왕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계시록 17장 2절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왕들의 어머니’로도 불리는 이시스 여신의 아들이 호루스이며, 호루스의 아들이 애굽의 황제 바로(파라오)입니다. 이 여신은 애굽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앗수르(앗시리아) 지역으로 이동한 다음 모습을 바꾸어 새로운 문명을 이루어갑니다. 앗수르 문명의 중심 도시는 니느웨인데, 그 뜻은 ‘호수 위의 여신’, ‘물 위의 여신’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 여신은 아세라 여신으로 변신해서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파괴하기 위해 활동했습니다. 이 여신들의 공통된 특징은 자유와 풍요의 여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제적 풍요와 자유를 상징하는 것으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영적 뿌리이며 원조가 됩니다. 음녀인 여신은 계속 모습을 바꾸고 있지만 그 본질과 정체는 변하지 않고 동일합니다. 어두움의 신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적 지속성을 가지고 활동합니다.
아데미 여신이 에게해와 지중해에서 활동하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기독교는 그리스 세계로 급속히 전파되었으며 아데미 신은 위축되었습니다. 성령 강림 이후 성도들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인격적 사랑의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모든 물질을 필요에 따라 나누며 공동체 지향적인 삶을 실천했던 것은 그리스인들의 물질주의적, 현세주의적 세계관에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리스의 원시적 자본주의 및 자유주의는 급격히 위축되었으며 결국 이를 뒤에서 조장하던 아데미 여신은 밀려나게 됩니다. 당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실천과 교회의 영적 부흥이 여신, 즉 음녀를 몰아낸 것입니다.
이때 다이아나 여신으로 변신했던 음녀는 또 다른 기묘한 전략을 구사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우상화하여 여신으로 둔갑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중세 화가들이 그리거나 조각한 마리아 상을 보면 늘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집트 고고학 발굴작업에서 발견된 애굽 최초의 여신 이시스 상도 그 아들을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시스 여신은 “나는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나중에 올 자다”라고 주장합니다. 이 문구는 이집트 사이스(Sais)에 있는 이시스 여신 기념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애굽 여신 이시스의 신전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나중에는 마리아 기념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탄생일로 지키는 크리스마스, 12월 25일이 이시스의 첫째 아들 호루스의 탄생일이라는 것과 그리스 정교가 예수 탄생일로 기념하는 1월 6일이 이시스 여신의 둘째 아들 아이온의 생일이라는 것은 분명 음녀, 여신의 장난입니다.
종교개혁과 프랑스 혁명 이후 북부 유럽의 판세는 크게 바뀌었습니다. ‘자유의 여신’의 부활로 인본주의 및 자유주의 사상이 뿌리를 내렸으며 자본주의가 발달하여 산업혁명을 낳았습니다. 북부 유럽의 자본주의는 이제 억제할 수 없는 추진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여신, 즉 음녀는 즉각 대륙을 넘어 물이 있는 곳, 영국으로 자리를 옮겨갑니다. 여신은 그곳에서 여왕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했던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묘사는 주목할 만합니다. 여신의 마법에 걸려든 시인들은 여왕에게 “다이아나 신이여 다이아나 신이여”라고 노래합니다. 당시 영국은 기독교 왕국이었는데도 영적으로 혼돈되어 이런 일을 합니다. 이것은 어두움의 영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영적 현상입니다.
영국과 바다를 끼고 갈라져 있는 프랑스에서도 영국과 경쟁이라도 하듯 자유와 풍요의 여신을 노래했습니다. 프랑스 화가들은 프랑스 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자유의 영을 불어 넣어준 장본인이 ‘자유의 여신’이라는 사실을 영혼 깊숙이 받아들이고 그 여신을 그려냅니다. 보십시오. 자유의 여신의 그림을! 군중이 손에 총을 들고 시체가 널려 있는 광장에서 열광합니다. 손에 총을 들고 요염한 모습으로 군중을 이끌고 있는 자유의 여신은 군중을 흥분시키며 열광하게 합니다. “오! 자유, 그대 위대하고 아름다운 이름이여!” 세속의 신들린 작가들이 그려낸 이 그림은 이후 대대손손으로 전해져 여신을 흠모하고 찬양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돌연히 자유의 여신은 미국으로 이동합니다. 새롭게 부상하는 미국을 통해 여신은 자신의 야망을 지구적으로 성취할 가능성을 본 것입니다. 프랑스는 무게 225톤, 높이 46m의 자유의 여신을 만들어 미국에게 바칩니다. 헌정식이 거행되는 날, 당시 미국 대통령까지 나와서 공식적으로 ‘자유의 여신’을 영접하는 국가 행사를 거행했고 미국인들은 열광했습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미국인들이 이렇게 여신을 받아들이며 열광할 수 있습니까? 이때 미국은 대각성 운동의 열기로 미국 기독교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영적으로 부흥하는 미국을 음녀는 기묘하게 공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헌정식을 할 때 한 시인이 낭독한 시의 끝부분을 보십시오. “너의 지치고 가난한/ 자유를 숨쉬기를 열망하는 무리들을/ 너의 풍성한 해안가의 가련한 족속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폭풍우에 시달린, 고향이 없는 자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황금의 문 곁에서 나의 램프를 들어올릴 터이니” 여기서 ‘황금의 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루살렘의 열두 문 가운데 예수께서 재림할 때 들어가기로 예정된 문이 바로 ‘황금의 문’입니다. 이 시에서 여신은 황금의 문을 막고 서 있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러니 “인생들이여, 안심하고 내게 오라!”고 하는 이 시는 얼마나 무서운 사단의 노래입니까? 이 시는 여신의 악령이 함께 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시입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풍성한 해안가의 가련한 족속들은 ‘물 위에 앉은 여신’의 노략 대상입니다. 음녀는 늘 물 위에 앉아 호수와 해안선을 중심으로 문명을 일으키고 다음에는 그들의 영혼을 집어 삼켰습니다. 음녀는 이집트, 에게해, 지중해, 프랑스, 영국, 미국 등 해안을 중심으로 세계적 문명을 일으키며 크게 활약했습니다. 음녀는 세계적인 문명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입니다.
수년 전 서울대 정치학과의 모 교수가 “미국은 자유의 여신을 숭배하는 나라다”라고 주장했던 것은 매우 의미 있는 발견입니다. 미국이 무리수를 쓰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강력히 추진하는 것을 보면서 세상 전문가들도 미국의 정체성을 어렴풋이 간파한 것입니다. 미국의 정책적 기조와 방향성을 보면 미국이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서구 사상을 따르는 것 이상입니다. 미국의 엘리트들은 마치 자유주의 및 자본주의가 절대적 신앙인 양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 17장 6절에는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시록 기자가 환상의 계시를 보고 왜 이렇게 기이히 여기고 있습니까? 그것은 ‘자유의 여신’이 그렇게 악한 여신, 음녀였다는 사실을 몰랐다가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되니까 놀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제국임을 자랑하는 국가들이 음녀를 숭배하는 세력이었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것도 그 음녀가 성도들의 피에 취해 있다는 사실은 그 가능성조차 상상해보지 못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 문명사적 맥락에서 세계를 영적으로 도해하지 않고는 잘 잡히지 않는 가려진 실체입니다.
미국 장악에 성공한 자유의 여신은 1900년대 초에 제일 먼저 기독교를 공략했습니다. 신학의 탈을 쓰고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지성사회와 미국 유수의 대학인 하버드대학, 프린스턴대학 등을 세속화시켰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대학이었던 연세대와 이화여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음녀가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된 후 자유주의는 이제 천하무적이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또한 세계체제를 이루며 계속 팽창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세 가지 악한 영적세력 중 하나는 용입니다. 이것은 사단을 가리킵니다. 또 하나는 짐승입니다. 이것은 적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녀는 큰 성 바벨론, 즉 자본주의 문명을 말합니다. 사단은 뒤에 숨어 있으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적그리스도는 “과거에 있다가 지금은 없고 나중에 나타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배후에서 음녀를 앞세워 일하지만 곧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낼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17장 3절을 보면 음녀가 짐승을 타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짐승, 즉 적그리스도가 음녀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음녀로 하여금 부단히 활동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음녀가 어떻게 죽는지 아십니까? 짐승이 그 음녀를 멸망케 합니다. 계시록 17장 16-18절을 보십시오. “네가 본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 이것은 매우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악으로 척결하시는 것입니다. 악은 악과 충돌합니다. 의인에게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께서 행하십니다.
계시록 17장 12절 이후에는 마지막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0개 나라의 왕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10개 나라가 적그리스도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엄청난 힘을 형성하여 어린 양에 대항해서 싸웁니다. 주께 정면으로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열 왕은 왜 적그리스도를 도울까요?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주사”라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은 악한 자들로 하여금 자기 뜻대로 하도록 방치하십니다. 하나님이 악한 일을 시킨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신들이 악을 선택해서 스스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주님의 뜻은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18장에서는 음녀, 19장에서는 짐승, 20장에서는 용이 예수님의 심판을 받고 차례대로 사라져 갑니다. 음녀인 큰 성 바벨론이 붕괴하자 가장 슬퍼하는 사람은 왕들과 상고(상인)들입니다. 특히 상고들이 더 요란하게 슬퍼하며 황당해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큰 성 바벨론이 세계 경제체제, 즉 자본주의 문명과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큰 성 바벨론이 붕괴될 때, ‘일순간에’ 붕괴한다는 것이 3번이나 강조되고 있듯이, 자본주의 체제는 지구적 팽창을 이루었을 때 더 이상 팽창하지 못하고 빅뱅하고 맙니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짐승과 원흉인 사단도 유황불에 던져져 끝이 날 것입니다.
9. 마지막 시대
머지않아 출범하게 될 세계정부 혹은 세계제국은 앞으로 짐승의 조종을 받고 전 세계 인류를 통제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 짐승은 모든 사람들에게 ‘짐승의 표’를 받게 하고 만약 받지 않으면 매매를 못하게 할 것입니다. 경제 시스템을 장악하고 인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장악한 배후의 영적 세력입니다. 그러나 세계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짐승의 표인 666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전 세계인이 모두 신용카드만을 사용하는 세계의 전면적 신용체계와 디지털화가 실현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세계를 뒤흔드는 신용사고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것은 신용카드 위조사건입니다. 수십, 수백 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할 것입니다. 세계를 장악한 세계정부나 세계제국은 이러한 사고를 사전에 막지 않고 방치하거나 유도할 것입니다. 이런 사고가 두세 차례 발생했다고 합시다. 사람들은 이제 세계장악 세력의 요구에 순순히 응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생체 바코드화입니다. 계시록 13장 16절 말씀처럼 이마나 오른손에 짐승의 표가 박히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감정적으로나 여러 면에서 원치 않겠으나 이어지는 지구적 규모의 신용사고들은 세계시민들로 하여금 이에 순응하도록 유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때에는 지구 위에 떠있는 수천 개의 위성이 생체 바코드를 인식하고 지구 어디에 가든지 통제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런 날이 오면 어떻게 될까요? 범죄가 사라집니다. 테러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쟁은 물론 이전에 사라질 것입니다. 세계 모든 인간이 디지털 시스템으로 통제받는데 어떻게 범죄하며 테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세계평화가 드디어 완성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완전한 세계평화! 드디어 인류 역사상 완전한 세계평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2001년 9.11 사태 이후 세계는 전통적인 전쟁 형태를 벗어나 미국 보수주의 TV 언론이 명명한 이른바 새로운 전쟁(New War)에 돌입했습니다. 9.11 사태 이후 이슬람 전사들은 새로운 전쟁을 수행합니다. 전 세계가 전쟁터이며 우리 마을과 주변, 길거리, 지하철, 공항이 모두 전쟁터입니다. 소위 포스트모던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전방위적 전투가 예측하기 어려운 때에 예측하기 어려운 곳에서 발생합니다. 왜 이들이 이러한 전쟁을 합니까? 약자들이 절대강자에게 대항하여 할 수 있는 전쟁의 형태는 이러한 전방위 무차별 전투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지구적 갈등으로 이해되는 이러한 문명 충돌적 지구전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세계정부와 체제에 불만을 품은 비이슬람권 범죄 집단들도 알 카에다의 방식을 본받아 무차별 포스트모던 전쟁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세계시민들은 심리적 공항상태가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범죄와 테러, 전쟁이 없는 세계평화가 지구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세계시민은 이러한 평화를 이룬 세계체제에 열렬한 박수를 보낼 뿐 아니라 ‘새로운 세계체제’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낼 것입니다. 세계적 규모와 체계적이고 디지털화된 미시적 및 총체적 지구시민 통제권을 장악하고 정치사회적 평화를 구축한 적그리스도는 완전한 통치자요 추앙되는 신적 지도자가 되기 위한 계략으로 그가 얻은 지구적 인기와 지지 그리고 힘을 바탕으로 마지막 갈등요인을 제거할 것입니다. 그것은 공의(justice)의 문제입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는 무한경쟁과 경제사회적 불평등의 원천인 자본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문명을 강력히 비난하며 과거 공산사회주의자들이 시도했던 바로 그것, 즉 세계를 ‘기계적 평등체제’로 이행시켜 놓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계시록 17장 후반부에 나타난 바대로 짐승이 음녀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제 세계는 소위 세속적 유토피아가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지구적으로 팽창할대로 팽창한 세계 경제체제는 성장을 멈춰 곧 빅뱅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일시간에 붕괴되는 것입니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의 붕괴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짐승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더하게 될 것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생체 바코드 시스템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계시록의 말씀이 그들을 붙잡게 될 것입니다. 체포된 그리스도인에게 “왜 당신들은 수 천년 인류 역사 이래 고통하던 세계에 번영과 평화가 이루어졌는데 이를 거부하는가?”라며 대답을 강요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이라고 대답할까요? “성경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대답을 들은 세계체제의 심정없는 하수인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 대답은 전혀 설득력 없고, 그를 교조주의적이고 근본적이며 대책없는 무식한 그리스도인으로 매도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세계평화를 거부하고 위협하는 지하조직, 저항집단의 소속원이라는 이유로 처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계시록 14장에서 봅니다. 무자비한 짐승의 횡포와 배교 그리고 성도들의 순교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로운 승리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첫째, 이들 성도들은 ‘여자’, 즉 음녀와 더불어 더럽혀지지 않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단의 시험과 도전 앞에서 단호히 경제권력, 종교권력, 사회정치권력을 거부한 성도들입니다. 둘째, 이들 성도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끝까지 따라가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마지막 시대 짐승의 무자비한 횡포가 시작되고 신자들이 배교하며 성도들이 순교당할 때, 놀랍게도 주님은 힘없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어린양을 따라가겠습니까? 그러나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승리자들입니다. 셋째,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성결과 거룩을 사모하며 끝까지 정직성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은혜 가운데 강한 모습을 견지한 성도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들 승리자들은 미션을 가진 성도들입니다. 변방 민족들에게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과 선교사역에 헌신한 중보기도자들, 그리고 거룩한 교회입니다. 이들이 세계역사를 마감시킵니다. 이들이 history maker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이것이 주님의 재림의 절대 조건입니다. 잔인한 짐승의 횡포에도 주님은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2천년 전에 십자가 앞에서 어린양처럼 잠잠하셨던 주님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제국의 권세 앞에 잠잠히 어린양으로 가셨던 예수님, 바로 그 분이 마지막 짐승의 날에 나타나실 주님의 모습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주님은 오순절에 임하셨던 바로 그 성령을 부어주셔서 땅끝까지 영원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역사를 시작한 것도 태초에 계신 말씀이요, 이 땅의 역사를 마감시키는 것도 바로 이 말씀, 영원한 복음입니다. 주님은 짐승과 사단을 멸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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